Today's Sermon
April 27, 2025
본문: 사도행전 16:24-32
어둠을 몰아내고
서론: 우리는 보통 하루의 시작은 아침부터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루의 시작을 저녁부터 라고 생각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바로 유대민족의 이스라엘입니다. 유대인들의 하루는 해지는 저녁부터 이튿날 오후 해지기 직전까지입니다. 즉, 어둠으로 시작하여 밝음으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유대인들의 독특한 시간관이 그들을 비참한 고난의 역사속에서도 굳세게 살아남게한 원동력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오늘이 아무리 힘들어도 내일은 지금보다 낳을 것이니 참고 기다리자”라는 사상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구약 창세기의 천지 창조의 기사에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란 말이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 까지의 창조 기사 다음에 나옵니다. 아마도 유대인의 독특한 시간관이 여기에서 근거한 것이라 사려 됩니다.
이스라엘 국가의 곡명은 히브리어로 ‘하티크바’이며 우리 말로 「희망」 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찬송가 「밝은 빛을 따라서」는 현 이스라엘의 국가 곡조입니다. 이스라엘 국가를 「하티크바」하였는데, 약칭으로 「하티카」라고도 한답니다. 작사자는 나탈리 헤르츠 임베르(Naftali Herz Imber, 1856~1909)로서, 그가 1887년에 가사를 썻는데, 이때는 유대인들이 나라없이 2천년 가까이 세계에 흩어져 살던 때였습니다. 편곡자는 몰다비아(Moldavia)에서 이민 온 사무엘 코언(Samuel Cohen)이이며, 곡조는 스메타나가 스칸디나비아 민요에 기초하여 주제로 한 「몰다우강」 노래에서 왔다고 하지만, 원래 이 곡조 가락은 작곡자를 알 수가 없는 히브리 전통 가락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여러 사람이 히브리어로 불러 CD를 냈습니다. 히브리어 글자가 좀 어려워서, 영어로 번역된「이스라엘 국가」 가사를 인용해 보면 “As long as deep in the heart, The soul of a Jew yearns, And forward to the East To Zion, an eye looks Our hope will not be lost, The hope of two thousand years, To be a free nation in our land, The land of Zion and Jerusalem.” “마음속 깊이 유대인의 영혼이 동경하고 갈망하며, 동쪽으로 시온을 향하는 한 눈을 가진 우리의 희망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이천년의 희망, 우리 땅 시온과 예루살렘에서 자유 국가가되는 것.” 이 곡은 1897년 제1회 Zionist 대회에서 찬가로 채택되었고, 1948년 5월14일 이스라엘이 독립되면서 국가로 불렸습니다.
1937년 프랑스 영화 중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History Is Made at Night)’의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세상의 모든 큰 사건은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우리들의 말과 글에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근대와 현대의 중요한 국내외의 큰 사건들이 밤에 이루어 졌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는 깊은 절망의 밤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찬양을 드리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 실라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전도자의 신앙으로 많은 주님의 역사가 잃어나는 사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지는 몇 가지 큰 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두 사도는 매를 맞고 사슬에 묻겨 어둡고 침침한 감옥에 던져졌지만 그들은 희망의 찬양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24,25절) 바울은 드로아에서 밤에 환상 속에서 본 하나님의 뜻을 굳게 믿고 아시아로 향하던 방향을 바꾸어 유럽을 향했습니다, 마케도니아 (유럽)의 첫 성 빌립보에서 그들은 뜻하지 않은 환란과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칠흑같이 어두운 감옥속에서 엄습하는 두려움 속에서 어둠을 몰아내고 찬양을 드렸습니다.
둘째, 그들은 구원 속에서 또다른 영혼을 생각하는 배려의 마음을 가짐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었 습니다. (27,28절). 바울과 실라는 주의 능력으로 인해 바울의 선교의 여정에 있어 가장 중심이 되어온 빌립보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자주 옷감 장사 루디아 집이 첫 열매이고, 그 다음이 감옥의 간수장의 집이었습니다. 이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 중 유일하게 물질적 도움을 주었던 교회였습니다.
셋째, 믿는 자의 구원은 나와 그리고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본문31,32절에서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고 쓰여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9,10절에서 세리였던 삭개오의 회개의 삶을 보시며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의 신민지였던 유대 나라에서 세리는 지배자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누어 들이는 매국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 삭개오가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자 예수님은 그의 온 집에 구원을 선포한 것입니다. 바울은 옥의 간수가 구원의 조건을 물었을 때 “너와 네 집이 주 예수를 믿으라” 했습니다.
결론: 하나님이 언젠가는 시온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는 약속을 믿는 유대인에게 하나님은 소망을 가졌다. 윤동주 시인의 시중에서 ‘쉽게 쓰여진 시’의 한 소절을 인용합니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어두움을 내모는 찬송과 기도를 드리고, 새벽을 깨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새 찬송 487(통535)장의 가사를 함께 나누어 봅니다.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바람분 후에 잔잔하고 소나기 후에 햇빛 나며 수고한 후에 쉼이 있네. 연약함 후에 강건하며 애통한 후에 기쁨있고 눈물 난 후에 웃음 있고 씨뿌린 후에 추수하네. 괴로움 후에 평안 있고 슬퍼한 후에 기쁨 있고, 멀어진 후에 가까우며 고독함 후에 친구 있네. 고생한 후에 기쁨 있고 십자가 후에 영광 있고, 죽음 온 후에 영생하니 이러한 도가 진리 로다”
April 20, 2025
본문: 누가복음 24:1-9
부활의 저편
서론: 기독교 절기 중에 가장 큰 절기는 물론 성탄절입니다. 많은 사역자들은 부활절이 가장 큰 기독교의 절기 라고 주장하십니다. 아마도 그 분들은 주님의 수난까지 포함해서 하시는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15:3-4을 보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사도 바울이 기독교 복음의 기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절이 가장 중요한 절기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예언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온갖 수난과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우리 죄를 담당하고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의 자녀들이 성장해서 가장 귀하게 보일 때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고 느꼈을 때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성장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생활은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기 위한 훈련들이라 저는 생각해 봅니다. 오늘 부활주일은 주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으니 물론 기뻐해 야지요.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상황 속에서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가장 고통스러울 때는 예수께서 온갖 멸시와 고통과 수난을 당하시고 십가가에 죽으시는 상황을 그대로 지켜보아야 했던 순간 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자리에선 고난과 십가가의 죽으심 보다 더 쉬울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이니까요. 그래서인지 성경에 부활에 관한 내용은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오늘 부활절에 주의 성전에서 예배 드리는 우리는 주님의 부활의 저편에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들을 발견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 먼저,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 승천했다고 해서 부활의 영광과 기쁨에 젖어 이전 하나님이 우리에게 배푸셨던 긍휼과 자비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롬6: 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며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거기에 더 중요한 것은 그 분들께서 자녀들을 위해 고통을 참으시며 헌신의 세월을 보내셨기 때문에 더욱 그리해야 합니다. 저는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견디신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며 나의 신앙을 다시 가다듬습니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달리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리막 비탈길을 치닫는 사람처럼 그렇게 정신없이 내달리는 성도들이 돼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가파른 등산길을 오르는 등산가처럼 내가 올라온 길과 올라가야 할 길을 번갈아 살피면서 우리의 영적 경주를 해야 합니다.
둘째, 주님의 부활이 기독교의 큰 의미 중의 하나인 것은 고통과 좌절 그리고 처절한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사는 이세상의 삶은 고통 슬픔, 비통함으로 얼룩집니다. 우리는 지난 2020년부터 3년 이상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주위의 사람들을 비통함에 보내야 했습니다. 또 이제는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자연 재난으로 수많은 파괴와 인명 피해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또, 1930년 경제공황 이후로 세계가 최대의 경제적 혼란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이토록 세상은 지금 마가복음13:8에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실현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어떤 어려운 상황 낙심,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주 고난 주간 동안 묵상한 말씀 속에서 보았듯이 처절한 예수의 십자가 고난의 길에도 그와 동행한 무리가 있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슬픔을 못이겨 울며 따르는 예루살렘의 여인들과 구레네의 시몬이 있었습니다다. 20세기 초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선교사였던Glen Baker는 이 구레네 시몬에 대하여 “내 살결이 좀 검다고 해서 그것을 보고 나를 멸시하지 말찌니라. 그대들을 위해 주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이 어깨로 대신 짊어졌음을 잊지 말찌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북아프리카 출신이었이었습니다. 그러 이 분은 기독교사에 정말 위대한 일을 하셨습니다. 마가15:21에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라고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라고 하였는데,사도 바울 선생님이 이 구레네 시몬의 부인을 자기의 양어머니로 모셨던 것으로 추측합니다,
셋째, 우리 또한 마지막 날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체처럼 우리도 부활한다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일시적으로 부활한 사람은 많습니다. 나사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인 성 과부의 아들, 베드로의 기도에 의해 살아난 욥바의 다비다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육체의 숨을 거두신 후 무덤이 열리며 많은 사람들이 일어났다고 마태 27:52,53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영원한 육체로의 부활은 죽은 자의 첫 열매로서 우리에게 커다란 예표를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슴 아프게 떠나보낸 모든 성도들도 마지막 날에 다시 예수님처럼 영원한 육체로 부활할 것입니다.
결론: 부활을 한 죽은자의 소생 그 자체로 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부활의 저편의 사실들을 늘 되새기며 우리가 사는 세상속에 부활의 신앙을 심으며 사는 성도가 되십니다. 고전15: 51-55 말씀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55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April 13, 2025
본문: 마가복음11:1-10
어린 나귀를 타신 메시야
서론: 종려 주일이 되면, 거의 대부분의 교회나 많은 목회자와 성도가 사용하는 성경 분문이 바로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읽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아쉬운 점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종려 주일이라 많은 이들이 종려나무를 군중들이 들고 호산나 외침과 함께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한 주의 모습을 상상하시겠지요? 그런데 성경 해석가들이 말하기를 이 때 따르던 무리들이 5일이 지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다고 해석합니다. 저는 이 두 무리가 거의 다른 부류라고 생각합니다. 첫번째 무리는 자원하여 순수하게 예수님을 환영한 무리이고, 두번째 무리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 등 정교 세력들이 동원한 관제 대모였다고 봅니다. 물론 양쪽에 다 참여한무리도 있었겠지만 그 주류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사람을 시켜 자신이 타실 어린 나귀를 끌고 오라고 명하신 내용이 4복음서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이 내용의 성경 본문을 비교하며 읽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21:2-3절에 보면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라 하였습니다.
본문 마가 11:2-3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하였습니다.
누가 19:30, 31”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고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요한복음 12:14, 5을 보면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는 스가랴서 9:9의 예언이 500여년이 지난 다음에 성취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 입성할 때 어린 나귀를 타신 모습입니다.
민수기 22장에 보면 당나귀가 의인화되어 인간과 대화를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당나귀가 말을 할 수 있게 하여 그의 뜻을 발람에게 전하는 사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타신 어린 나귀에 대해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나귀는 히브리어로 ‘하모르(숫)’ ‘아톤(암)’ 이며 어린 나귀는 ‘아이르’입니다. 헬라어론 ‘오노스’ ‘폴로스(어린나귀)’ 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쓰신 “별을 헤는 밤”에 프랑스의 시인 ‘프랑시스 잠(Francis Jammes)’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아마도 윤동주 시인은 이 시인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19세기 초의 프랑스의 크리스챤 서정 시인인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에게 있어 진실이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며, 시가 깨끗하기 위해서는 시 속에서 진실을 노래해야만 한다. 그리고 글자를 메우려는 어린아이와 같이 아름다운 새나 꽃이나 매력 지닌 소녀 등을 의식적으로 묘사하는 일이다.” 그의 시 중 “나는 당나귀가 좋다”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를 잠시 읽어 소개해 봅니다.
“물푸레나무(동백나무) 긴 울타리를 끼고 걸어가는 순한 당나귀가 나는 좋다. 당나귀는 꿀벌에 마음이 끌려 두 귀를 쫑긋쫑긋 움직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태워 주기도 하고 호밀이 가득 든 부대를 나르기도 한다. 당나귀는 수챗가에 가까이 이르면 버거정거리며 주춤 걸음으로 걸어간다. 내 사랑은 당나귀를 바보로 안다. 어쨌든 당나귀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당나귀는 언제나 생각에 젖어 있고, 그 두 눈은 보드라운 비로드 빛이다. 마음씨 보드라운 나의 소녀야, 너는 당나귀만큼 보드랍지 못하구나. 당나귀는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이다. 푸른 하늘 닮아서 당나귀는 보드랍다. 당나귀는 피곤하여 가벼운 모양으로 외양간에 남아서 쉬고 있다. 그 가련한 작은 발은 피곤에 지쳐 있다. 당나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기가 할 일을 모두 다했다. 하지만 당나귀는 다쳤단다. 파리란 놈한테 찔렸단다. 측은한 생각이 들만큼 당나귀는 너무나 일을 많이 한다. 내 소녀야, 너는 무얼 먹었지? 너는 앵두를 먹었지? 당나귀는 호밀조차 먹지 못했다. 주인이 너무나 가난하기 때문이다. 당나귀는 고삐를 빨아먹다가 그늘에 가 누워 잠이 들었다. 네 마음의 고삐에는 그만한 보드라움이 없단다. 그는 물푸레나무 울타리를 끼고 가는 아주 순한 당나귀란다. 당나귀는 어두운 그늘 속을 착한 마음 한 아름 가득 안고서 꽃 핀 길을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이 시를 읽다 보면 오늘 우리가 낭독한 본문 속에 나타난 어린 나귀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타셨던 어린 나귀를 보며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먼저, 나귀는 순수함과 정결함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 끌고 오라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우리 주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새 이스라엘의 새 왕으로, 새 예루살렘의 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앞에 나아갈 때 얼마나 순수함과 정결함이 있는가?
둘째, 주인에게 저항하지 않고 순종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등에 타도 저항하지 않고 많은 짐을 등에 실어도 조용히 그가 걸어야 할 길을 갑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났다”삼상 15:22에 말씀합니다.
셋째, 자기 영광을 취하지 않는 겸손함의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이사야53:3)”,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한5:41에 말씀하십니다.
넷째,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십니다.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나귀를 끌고 오라 하실 때, '주가 쓰시겠다' 고 대답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붙들어 주신다. 시 147:6,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 도다”고 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결론: 예루살렘 입성하며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주님을 보며 이제 우리가 다시 주의 성전에 나아갈 때, 정결함으로 순종함으로 겸손함으로 주님 앞에 서는 성도가 되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욥 22:29는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 시 10: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라 하신다. 잠 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잠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사 29:19, “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신약 에베소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또 빌립보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듯이 교회를 섬기면서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April 6, 2025
본문: 요한복음 16:17-24
고난 속의 소망
우리가 사는 곳에 교회가 참 많은데 그 교회들의 목사님이 선포하는 메시지와 그 교회에서 강조하는 내용들이 크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믿으면 고난이 우리에게 많이 찾아온다는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를 믿으면 영육으로 복을 많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를 같이 강조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들이 한쪽으로 치우친 면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뜨거운 신앙을 가지면 병자가 치유되고 기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때론 우리가 당하고 있는 시련들이 더 길어져 견디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본체 이시고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성도의 시련과 기쁨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20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 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사순절 다섯째주일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그 후에 나타날 기쁨들을 여러분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고난은 아픔과 고통을 수반하지만 우리에게 커다란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시편 119:71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 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서 자기의 삶을 쉽게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인들 중에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고난에 대한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전 인 13장1절에 말씀하기시기를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사도 요한이 최후의 만찬에 대하여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낙심스러운 상황을 만나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며 붙들고 계십니다.
둘째, 나의 고난은 다른 사람에게 큰 유익이 되기도 합니다. 그때는 내가 그 고난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것이 나의 주위 사람들에게 커다란 유익이 될 때가 많습니다. 유럽 노르웨이에 한 어부가 두 아들을 데리고 바다에 자주 나갔습니다. 그는 두 아들이 좋은 어부가 되었으면 하였습니다. 어느 화창한 봄날 3부자는 고기잡이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어머니가 정성껏 마련한 점심을 들고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바다로 나왔습니다. 노련한 어부는 그날도 망망 바다를 향해 노를 저었습니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맑던 하늘이 음산해지면서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먹구름이 온하늘을 덮고 곧 폭풍과 함께 큰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삼 부자가 탄 조그만 배는 맹렬히 배를 때리는 노도 광풍과 싸우다 보니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없이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곧 절망의 밤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먼 곳에서 타오르는 불빛이 보입니다. 포구 족에서 타오르는 불빛이라 생각하며 죽을힘을 다하여 포구를 향해 노를 저었습니다. 이윽고 포구에 도착한 3부자는 마중 나온 아내와 재회를 했습니다. 기쁨으로 가득차야 할 아내의 얼굴이 고통에 차 있었습니다. 아내의 자초지정을 들어보지 바다에서 본 불빛은 그의 집이 타오르는 불빛이었습니다. 부엌에서 불어나서 온 집을 태웠다고 아내가 슬픔에 찬 얼굴로 울먹이며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남편이 하는 말이 “우리가 몇시간을 심한 풍랑으로 헤매다가 난파 직전에 그 불기둥을 보고 키를 잡고 노를 저어 이곳에 올 수 있었 소. 우리가 살았으니 집은 다시 고생하여 지읍시다.”라고 아내를 위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예화는 우리 인생의 실상을 말하여 줍니다. 가난하고 성실한 어부가 삶의 기로에서 방황한 것입니다. 인생을 즐기는 사치스러운 사람에게만 무서운 폭풍이 오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고 부지런히 사는 사람에게도 운명의 파도는 몰려옵니다. 하나의 무서운 절망의 시련을 지나면 소망의 문이 열리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고통속에서 우리가 찾은 불빛은 우리 생명과 영혼을 구원합니다.
성경에서 불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 상징입니다(출애굽기3:2).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의 상징(레위기9:24). 하나님의 보호의 상징(출13:21). 훈련과 시험(민수기3:3, 벧전1:7). 말씀의 상징(예레미야5:14), 심판(레위기10:2), 성령의 충만한 역사(사도행전2:4, 출애굽기40:34) 입니다.
셋째, 고난은 해산의 수고와 같습니다. 본문 21절에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해산의 진통과 흡사한 고통이 그의 제자들에게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통은 마땅히 우리가 통과해야 할 관문입니다. 그리고 후에 오는 놀라운 생명의 은혜로 인하여 고통이 곧 잊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욥기23: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고 하셨습니다.
끝으로, 본문 23에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날(테 헤메라)’에 대해 신학자 외스트 코트(Westcott)는 이날은 오순절로 해석하나 장차 주님이 오시는 날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우리는 세상에서 사는 삶에 대한, 그리고 고난에 대한 질문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단지 서로 믿음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잃지 말며 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본장 마지막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하신 말씀을 붙들고 환란과 고난 중에도 평안과 소망을 잃지 않는 성도가 됩시다.
March 30, 2025
본문: 누가복음 22:39-46
고난의 여정(Via Dolorosa)
서론: 우리가 지내는 사순절이 실제는 46일 동안 지내는 절기입니다. 사순절이란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까지 주일을 제외하고 40일 말합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6번의 주일을 보냅니다. 그리고7번째 주일이 부활절입니다. 우리는 오늘 잠시 사순절을 이렇게 길게 잡아 지키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에게 삶이란 고난의 여정이라는 점을 잊어서도 안 됩니다. 많은 성도들이 적어도 초창기에는 예수를 믿으면 기쁘고 즐거운 일만 계속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면 그리스도도인 삶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가수 Sandy Patty가 1989년 불러 발표했던 노래 ‘The Via Dolorosa(비아 돌로로사)’를 아실 것입니다. 이 제목은 원래 라틴어 말인데 "Sorrowful Way”, “Way of Suffering"란 의미입니다. 우리말로, “슬픔의 길”, “눈물의 길”이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길은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에 있는 ‘박석(리토스 트로토스)’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m의 길, 그리고 골고다에서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를 소개해 봅니다.
“그날 예루살렘의 고난의 길을 따라서, 군인들은 좁은 길을 통제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갈보리에서 죽기로 정죄된 한 남자를 보겠다고 밀어댔죠. 그분은 매를 맞아 피를 흘리고 계셨어요. 그분의 등에는 채찍자국이 있었죠. 그분은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계셨죠. 그분은 한걸음 한걸음 그분의 죽음을 외치는 이들의 조롱을 참아내셨죠. 고난의 길이라 불리는 비아 돌로로사를 따라서. 어린 양처럼 오신 메시야, 왕 되신 그리스도. 하지만 여러분과 절 위한 사랑으로 그 길을 걷기로 선택하셨죠. 갈보리를 향하는 고난의 길을 따라서. 모든 이의 영혼을 깨끗케 할 그 피가 예루살렘의 심장을 향하는 길을 만들어냈죠”
사실, 성경 속에서 자세히 보면 주님의 고난의 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감행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의 책임을 축소해 보려고 그 당시 앞제 자였던 로마 군인들의 행동을 더 조명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가장 미워했던 사람도 유대 종교 지도자이고, 또 그들의 명을 받은 유대 병정이 직접 체포해서 심문하고 정죄하고 로마군에게 넘긴 것입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 된 것도 유대인 그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공관복음서 모두에 유사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서에 만 나오는 표현은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는 부분입니다. 오늘 저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흘려 기도하시며 온세상의 죄를 감당하고 큰 고통 앞박 중에도 고난의 길을 결심하신 주님의 기도를 살펴보며,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고난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 또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의 삶을 어떻게 해쳐나갈 것인지를 상고하여 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 성도의 길은 기쁨의 순간보다 고난의 시간이 더 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관 복음서의 주님의 수난을 언급한 기사가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서에는 겟세마네 동산부터 시작한 주의 고난이 107절이고, 마가복음에는118절을, 누가복음에는104절을 할애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마지막 고난 주에 당하신 기사만 이정도인데 예수님의 공생애 3년, 그리고 그분의 33년 삶속에서는 얼마나 많았을까요? 어떤 법률가 출신 목사님이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실 때 어떤 죄인의 사형 집행이든 상관이 없고, 또 짧은 고통 중에 죽으셨어도 공의 적인 입장에선 하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 왕의 왕 된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실 때 그 큰 고통을 오래동안 견디시며 그 쓰라린 아픔을 다 감당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감당하신 이런 긴 고난의 사실을 보면 우리 성도의 긴 고난의 여정도 우리에게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어야 합니다. 이사야 53:3-5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둘째,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이 대부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는 본문 바로 전에 최후의 만찬에 관하여 나오는 기사 중에 3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유다가 배신할 것을 암시하는 것과 제자들이 예수 앞에서 누가 크냐고 다투는 것과 베드로의 예수 부인에 대한 예언입니다. 우리 성도에게 찾아오는 고난이 나와 밀접한 곳에서 나와 가까웠던 사람으로 부터 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합니다. 육체적 고통도 견디기 힘들지만 정신적인 고통과 상처는 더 오래 가며 치유되기도 힘듭니다. 자기 제자인 유다의 배반과 수제자인 베드로가 자기 선생을 부인할 것을 미리 아신 예수님의 고통은 어떠했을까요? 사 53:6 -8“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라고 하였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드리는 기도도 기쁨 속에 드리는 기도보다 고통 속에 드리는 기도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감사와 기쁨속에 드리기도 하지만, 저마다 고통을 가슴 깊이 안고 애통하며 우리는 기도를 많이 드림니다. 자기 자신보다 소중한 자기자녀의 질병과 고통을 위해 쓰라린 마음으로 기도들입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 하심니다. 고린도후서 1:3~4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론: 어떤 성도는 사순절에 46일의 긴 기간 동안 그리스도의 그 고난 만 생각하며 동참하는 것이 너무 길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우리 인생은 기쁨은 잠시이고 그 대부분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며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통속에서 인생을 배우고 고난과 시련속에서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시련을 함께한 신앙의 동지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저 하늘에서 영원이 함께할 친구입니다.
March 23, 2025
본문: 이사야53:7-12,
마태복음5:43-45
비 폭력적 저항의 그리스도인
(The Christians of Non-Violent Resistance)
서론: 오늘은 사순절의 세번째 주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를 깊이 새기며 지내는 것이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입니다. 20세기 초 인도 독립 운동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가 주장했던 간디주의(Gandhism)라고 불리는 비폭력 저항주의는 그의 대표적인 정치철학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비폭력, 불복종, 비협력을 의미하는 사상과 행동에서 유래합니다. 그 근본사상은 정절을 지키면서 적을 사랑하고 폭력을 부정함으로써 개인의 자유와 인도의 독립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간디의 무저항주의는 비폭력주의로 요약됩니다. 부정이나 압제, 폭력 등에 대응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저항하는 사상을 비폭력주의라고 하는데, 이는 평화주의의 한 형태입니다. 그는 영국의 압제에 대한 인도의 독립 운동을 벌이며 무저항주의를 주장했습니다.
간디가 어느 날 그 당시 인도의 선교사였던 스텐리 존스를 만나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창세기를 읽는다. 그러나 연이은 장들은 변함없이 나를 졸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신약은 다른 감명을 자아내었다. 특별히 산상수훈은 내마음에 와닿았다. 그 포기는 종교의 가장 높은 수준으로서 거대하게 나에게 호소했다. 톨스토이의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책은 나를 휘어잡았다. 그것은 나의 안에 늘 함께 하는 감명을 남겼다.” 이런 그의 고백을 보면 그의 사상이 예수님의 산상 수훈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비록 간디가 결코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지만 기독교 사상과 태도의 경향은 그의 삶을 관통하고 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내가 나의 기독교 친구들이 원치 않는 길을 택했지만 그들이 나를 일깨워준 종교적 탐구에 대해 깊이 빚진자의 심정을 갖고 있다. 나는 항상 그들과의 만남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추억을 담은 해를 이은 교제들이 나의 마음에 달콤한 추억으로 남아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을 담당하기 위해 수난을 당하시며 보이셨던 모습을 상고하려 합니다. 본문 서두에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의 모습과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의 무저항적 모습으로 주의 고난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양은 선한것이 그 성품의 특성입니다. 양은 거칠게 다루어도 큰 반항을 하지 않습니다. 메시야를 양에 비유하는 것은 주의 메시야 사명 수행이 결코 폭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비 폭력 무저항의 침묵으로 그의 사역을 수행합니다. 이 두가지 면의 수난 속 그리스도의 표현에서 하나는 그 마음을, 하나는 그 행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속의 예언된 고난을 당하신 메시야의 모습 속에서 어떤 은혜를 우리가 깨닫고,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첫째, 그리스도의 침묵 이유는 아버지로 부터 위임 받은 사역의 완수를 위함입니다. 본문7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말하기를 “겸손함과 침묵이 신자의 미덕은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모두에게 다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해당되는 부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억눌리고 약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삶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조금 집중하며 생각해보면, 우리의 사회엔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사회 인도자와 지도자는 겸손함과 침묵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권력을 함부로 자기를 휘두르고, 참지 못해 아무말이나 사용하면 우리는 그를 부족한 지도자라고 합니다.
어떤 농부와 아들이 추수때가 가까워지자 같이 밀 밭에 나갔습니다. 바람에 물결치는 것 처럼 보이는 황금 들력을 바라보다가 아들이 곡식 벼들을 자시히 보며 말하기를 “아버지, 밀 벼가 바람에 흔들리다가 다시 곧곧히 일어서는 것은 건강해 보여 참 보기가 좋군요. 그런데 바람에 구부러졌다가 금방 일어서지 못하고 고개를 제대로 들지못하는 밀벼는 참 약해보이는 군요.” 그러자 아버지는 그 두 가지의 밀 벼를 끊어다가 손바닥에 비벼서보여 주었다. 고개를 빳빳하게 처들고 있던 이삭 속에는 곡삭 낟알이 많이 들어 있지 않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이삭속에는 황금 낟알이 가득히 차 있었다. 우리 말에 “읶은 곡식일수록 고개를 숙인다”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기가 신앙의 연륜이 깊어 갈수록 우리는 오늘 본문의 그리스도의 수난 속 모습을 되새겨야 합니다.
둘째 인내의 모범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벧전2:19-21”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 삶속에서는 때때로 우리가 상상하지 감당하기 힘든 시련들이 닥쳐 옵니다. 우리를 세계사 속에서 ‘무저항 주의’를 외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세상의 그 어떤 위인보다 무저항 주의를 실천하신 우리주 그리스도 예수심니다.
셋째,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 위해 그분은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창세기의 요셉의 모습을 보십시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이 주신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통과 시련을 견디며 인내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사실 많은 신학자들이 요셉을 예수님과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은 30냥에 팔린 것, 고난속에서도 묵묵히 견디며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 등입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그가 어려운일을 당하고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할 때도 실망이 컷다라는 부분은 찾아볼 수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나라의 국기에도 상징으로 새기는 다윗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했습니다. 삼상24장에 보면 사울이 군사 3000을 거느리고 다윗을 잡으려 다니다가 하필이면 다윗이 쉬고있는 굴에 들어와 피곤하여 잠이들었다. 6절에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7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아마도 후대에 도 그를 위대한 왕이라 칭하고, 우리 성도는 그를 위대한 신앙의 스승이라 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인생에서 한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오지 않는다고 가르침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을 사는 사람은 그렇게 살 필요는 없다. 오히려 긍휼과 침묵을 지키는 것이 주님 앞에서는 목이됩니다.
결론: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고통에 직면합니다. 고난을 대하는 모든 사람의 태도는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모를 정도로 억울하고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당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한 고난을 내가 꼭 당해야 하는가? 구세주 이시며 완신완인이신 주님처럼 우리가 인내하며 침묵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핏값으로 얻어진 주의 자녀이며,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친구라고 부르시지 않습니까? 또한 그분의 제자라고 불리우는 우리도 있구요. 이런 깊은 연관이 있는데 좀 그분의 고난속 모습을 조금씩 따라해 보는 것이 구속함을 얻은자의 도리가 아닐까요? 우리 성도 중에도 짧지않은 삶을 살면서 그때는 도저히 감당할 수 고통의 신음만하며 모진 세월을 견디어 낸이도 있습니다.
March 16, 2025
본문: 디모데후서 3:10-17
선한 힘을 가진 그리스도인
서론: 방금 우리가 드린 찬양은 탁월한 신학자이면서 예언자적인 시인의 감성을 가진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목사님이 쓴 시에 ‘시그프리드 피에츠(Siegfried Fietz)’가 곡을 붙인 노래입니다. 본회퍼 목사님의 삶을 그린 하나의 영화가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개봉됐습니다. 영화 제목은 「본회퍼: 목사, 스파이, 저격자」(Bonhoeffer: Pastor. Spy. Assassin)입니다. 1940년대 베를린을 배경으로 나치 독일에 맞선 본회퍼(1906-1945)의 삶을 극화한 작품입니다. 나치를 반대한 고백교회의 창립 멤버였던 본회퍼는 히틀러의 집권에 강력히 반대하며 1930년대 독일에서 지하 비밀 신학교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본회퍼는 나치즘에 저항하며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 등의 명언을 남겼고, 아돌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향년 39세의 나이에 처형됐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이것이 끝, 나에게는 생명의 시작이다'라는 말을 남깁니다. 나치제국의 독재자 히틀러에 저항하다가 체포된 후, 그가 테겔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타자로 그의 유언적 시를 썼습니다. 모두 7절로 돼 있는데, 글을 쓴 날짜는 1944년 12월 19일입니다. 다가올 새해를 생각하며 주님을 신뢰하며 쓴 이 시는 ‘본 구튼 메이쉬튼(Von guten Machten)’ 이란 제목의 시이며 본회퍼 목사의 옥중 유고중의 하나이며, 사형당한 그해 새해에 어머니와 그의 약혼녀에게 바친 그의 마지막 글이자 시입니다. 이 시는 독일 교회에서 매우 사랑받는 시이며 찬송가입니다. 우리말 가사에는 4절까지만 되어 있지만, 그 전문을 잠시 보겠습니다
"선한 능력에 언제나 고요하게 둘러 쌓여서, 보호받고 위로 받는 이 놀라움 속에 여러분과 함께 오늘을 살기 원하고 그리고 여러분들과 함께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기 원합니다. 옛것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어두운 날들의 무거운 짐은 여전히 우리를 누르지만, 오 주님, 내몰려 버린 우리의 영혼에게 주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주옵소서!
주님께서 쓰라리고 무거운 고통의 잔을 가득 채워 저희에게 주셨으므로 저희는 그 잔을 주님의 선하고 사랑스런 손으로부터 떨림없이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저희에게 이 세상에서 기쁨과 빛나는 햇빛을 주기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지나간 일들을 회상하며 저희의 생명을 온전히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어두움을 밝히신 촛불은 오늘도 밝고 따뜻하게 타오르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다시 하나되게 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빛이 밤을 비추고 있음을우리는 압니다.
이제 저희 주변 깊은 곳에 고요가 편만할 때, 저희 주변을 보이지 않게 에워싼 세상에 온전히 울려 퍼지는 소리를 저희들이 듣게 하옵소서.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소리 높여 부르는 찬양을. 그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의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낭독한 본문은 사도 바울이 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며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본문 전 3장 서두에서는 19가지의 타락한 신자의 죄의 목록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가지는 죄, 사람에게 가지는 죄 하나님께 대한 죄로 분류되어있다. 오늘 본문은 참 선한 주의 일꾼의 행할 바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로 오는 어떤 선한 힘을 가져야 할까요?
첫째, 선한 능력을 가진 성도는 마음에 선한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를 받으면 선한 힘이 항상 그대로 유지되는 것으로 착각하여 자기 마음과 생각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선과 악의 모습이 시시각각으로 나옵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이 주시는 선으로 채워 나가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금방 악이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마태 12:35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선한 힘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의 눈이 선합니다. 잠22:9“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고 했습니다. L.A.에 사는 클라크라는 한 미국 부인의 간증을이 있습니다. 그 부인은 농장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가을철 추수 때가 되어 감자를 거두어 들여야 했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아 그의 능력으로는 그것을 다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딸에게 임금을 줄 터이니 감자를 거두어 들이자고 해서, 그 딸은 땀을 흘리고 애를 써서 감자를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한 가지 불평이 생겼습니다. 아버지께서 겨울에 자기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자기가 애써 거둬들인 감자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클라크는 그 감자가 너무도 아까웠고 자기가 그렇게 수고한 감자를 아낌없이 주는 아버지가 서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버지에게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얘야, 감자라는 것은 나누어 주어야만 우리에게 남는 법이란다. 나누어 주지 않으면 남은 감자가 썩어 버린단다." 그러나 클라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그 해 봄까지 감자가 썩지 않고 남아 있던 집은 클라크네 집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웃집들은 감자를 나누어 주지 않고 그대로 쌓아 두었기 때문에 썩어서 남도 못 주고 자기도 못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클라크네 집은 남을 나누어 주어 서로가 정답게 나누어 먹었고 자기네 집의 것도 썩지 않아 봄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움켜쥐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나누어 줄 때 더 좋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잠19:17절에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후하시고, 부하시며, 모든 능력이 있으십니다. 이런 분이 갚아주면 얼마나 더 유익이 되겠습니까?
선한 눈은 남의 필요를 알아채고 도와주려는 마음을 가진 눈입니다. 자기가 먹을 양식을 지금 양식이 떨어진 사람을 보고서 나누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남의 필요에 선하게 반응하는 눈이 복을 받는 것이지요. 필요를 알아채고도 선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반응하고 선하게 반응하고 순종으로 반응해야 복이 되는 것이지요. 사람은 반응을 잘해야 합니다. 특히 믿음에 반응을 잘해야 복을 받습니다. 예화) 나의 소년기 큰 영향을 준 은사가 있습니다. 그분은 참 선한 눈을 가지셨습니다.
셋째, 그 사람의 말에 선한 힘이 있습니다. 마12:34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그 사람이 하는 말에 따라 우리는 쉽게 그 사람의 악함과 선한 면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결론: 아무리 신실한 사람에게도 선과 악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우리는 늘 말씀으로 무장해 가지 않으면 언젠가 내가 오늘의 나와 같음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을 통해서 선한 교훈,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받자. 그리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되자. 가장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March 9, 2025
본문: 요한복음 21:14-19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성도
지금부터25년 전쯤 한국에서 유행한 유행가 중 사랑을 주제로 한 유행가 세곡의 제목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심초가 부른 ‘사랑이여’ 그리고 양희은 씨가 부른 ‘사랑이야’ 그리고 해바라기가 부른 ‘사랑으로’ 라는 노래입니다. ‘사랑이여’라는 말의 의미는 어느 날 자기에게 있었던 사랑을 그리워하거나 다시 자기에게 찾아올 사랑을 갈구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단어입니다. 그리고 ‘사랑이야’는 어느 날 문득 내 앞에 다가온 사람의 사랑을 느낄 때 쓰는 자기만의 조용한 감탄사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란 단어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받은 사랑으로 인해 그를 신뢰하고 또 받은 그 사랑으로 어떤 상황속에서도 감싸 안으며 그와 함께하는 세상을 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새 단어 중 뒤의 두 단어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사는 중 어느 날 내게 찾아온 주님의 사랑이 있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은 자기를 향한 그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삶도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랑’이라는 우리말 단어가 620회 정도 나옵니다. 히브리어는 ‘아하브’ 하나로 표현 돼있는데, 아가서의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 ‘도드’는 원래 ‘들끓다’의미고 사랑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헬라어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가페’, ‘필리아’, ‘스톨게’, ‘에로스’ 등 4가지가 있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보통 신약에선 ‘아가페’와 ‘필리아’가 대부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21장의 후반부에 나오는 내용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문애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사랑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아가페’와 ‘필리아’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할 때 첫번째와 두번째의 질문이 ‘아가파스 메’ 이고 세번째가 ‘필레이스 메’입니다. 첫번째와 두번째는 신적 사랑을 말하며, 세번째는 형제적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3번 모두 대답이 ‘필로우 세’ 즉 “나는 형제적 사랑으로만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랑을 주님으로부터 경험할 수 있고, 우리가 어떤 사랑으로 세상에서 삶을 살 것인지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후 주님을 만난 베드로는 주님께 내가 이제는 주를 신적 사랑으로 사랑할 수 없고 단지 형제적 사랑으로 만 사랑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사도요한이 본서에서 5번씩이나 자기 자신을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the disciple whom Jesus loved)”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가 주님의 사랑을 누구보다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달리신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갔습니다. 자기 스스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장담한 베드로는 그곳에 가지 못했습니다.
둘째, 주님의 사랑을 친히 느끼고 경험하는 사람 만이 형제, 자매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10여년까지 우리 한국의 교회 안에서 쓰는 단어 가운데 ‘형제’ ‘자매’라는 애칭이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쓰이지는 않습니다. 이 호칭은 성경적으로 볼 때 참 훌륭한 단어입니다. 우리가 교회안에서 성도를 ‘Philadelphia’의 사랑으로 감싸 주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가 ‘아가페’적인 사랑을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몸을 입고 그 ‘아가페’적인 사랑은 거의 힘들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 프랜시스처럼 자기가 어느 순간 영적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 전까지는 형제적 사랑 뿐입니다, 우리말에 의리, 도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도 형제사랑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은 우리 형제 자매들에 대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4:11-12 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음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세번째, 주의 사랑은 참 섬세 합니다. 오늘 본문과 그 전후에 나타난 사실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평범한 삶 속에 친히 찾아가시고 그 삶에 역사 하십니다. 밤 늦도록 고기를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만선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또 고기를 153마리 잡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153이라는 많은 해석자들이 상징적으로 해석하려 합니다만, 그것은 5병2어의 기적 후에 상황과 비슷합니다. 무리들이 먹고 남은 것을 하나도 버리지 말라 하셔서 거둔 것이 12광주리었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친히 제자들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주사랑의 섬세함은, 조반 후의 베드로에게 세번의 질문을 통해 그의 세번의 실수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결론: 사도행전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하는 것은 권능이란 것은 사랑의 권능을 말하는 것이고, 증인 또한 주 사랑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준 세가지 명령은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목양하라. 내 양을 살찌고 기름진 것으로 먹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사랑이 동반되야 하는 것입니다.
March 2, 2025
본문: 이사야 43:1-7,
요한복음15:9-12
우리를 잘 아시는 주님
서론: 이번 주 수요일 부터 올해의 사순절 기간이 시작됩니다. 우리 신교(Protestant)는 오는 주의 ‘Ash Wednesday’를 그렇게 중요하게 지키지 않지만 구교 (Catholic)에는 중요한 교회적 행사로 여깁니다. 성도들이 이날에 교회에 가서 사제들로 부터 이마에 십자가 모양의 재를 그려 받습니다. 이 재는 지난 해 종려주일에 썼던 종려 나무 가지를 태워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재의 수요일’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죄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우리 몸에 재를 뿌리고 하는 회개 예식의 일부를 뜻합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 기간 동안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를 기리고 자신을 돌아 보며 진정한 회개를 의미를 되새기며 늘 겸허하게 우리 자신을 가다듬습니다. 이번 사순절에 첫번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나를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시고 자기 몸을 버리시고 십자가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 문장들 속에서 가득히 넘치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낍니다.
지금부터 30여년 전인 1994년 80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신 현 신애 권사님 이란 분에 계셨습니다, 이 분은 한국 교회의 현대사에 여성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 중에 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한국 교계에서 많은 분들이 신유 은사가로 유명한 이분의 신비주의적 목회 활동때문에 이의를 재기하기도 하지만, 80-90년대 한국 부흥사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준 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원래 병이 많으셨던 분인데, 병에 시달리다 갑자기 숨을 거두고 영혼이 천국에 갔었다고 합니다. 가서 보니 자신은 수많은 환자들을 고쳐주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다가 갔기에 자신의 집이 크게 지어져 있을 줄 알았는데 보잘것 없는 초라한 집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기를 모르느냐고 물었더니 예수님은 모른다고 하였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신실하게 잘 섬기고, 병고치는 능력으로 수많은 사람을 고쳐주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왜 예수님께서 저를 모르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내 능력을 가지고 네 장사를 하였지, 언제 나에게 영광 돌리고 나의 일을 하였느냐고 하시면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수많은 병자를 고치신 것은 주님만을 바라보며 사는 그들을 내가 사랑하였기에 그들을 고치셨다고 하셨답니다. 너무나 놀라서 예수님께 한 번만 회개할 기회를 달라고 사정을 하여 허락을 받아 되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마침 시신은 칠성판에 누여둔 채로 미국에 살던 아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입관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살아나서는 그동안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헌금한 것을 모아둔 것이 수십 억이 있었는데 그것을 전액 북한 선교원에 헌금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후의 모든 집회에서 시종일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말만 했고 자신은 낮추었습니다. 치료는 예수께서 하시는 일임을 누누이 강조했고,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예수님을 의지하라는 권고했습니다. 기도 받을 때도 자신을 붙잡으려고 하지 말고 편안한 자세로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할 것을 가르치고 또 주의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세상의 다른 사이비성 신유 은사 자들과는 유를 달리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권사님께 가르치신 우리를 향한 사랑을 이 사순절 전주에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실 까요? 오늘 본문 1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친히 창조하시고 조성하셨고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 이심니다. 하나님이 나를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 우리 성도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기본 줄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사업을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사랑의 관계 유지하며 그 속에서 속에서 우리의 풍성케 하시려는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이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 요한 10:10의 말씀이 그 뜻입니다.
둘째,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 어떤 고통중에도 함께하신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국의 한 유명한 방송인이 “자신은 늘 내가 지금 이순간 좀 운이 좋았을 뿐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운이란 말이 이상하지만 늘 이런 형태의 겸손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대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쩌다 큰 환란을 만나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면 사탄의 시험을 잠시 만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It will be we better” “곧 괞찬아 질거야”라는 마음으로 기도 가운데 시련들을 견디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를 통하여 주의 복음을 전파하고 우리가 주님의 영광이 되게 하십니다. (7절)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우리는 아버지의 영광이 되기위해 우리의 입술과 우리의 삶을 통해 그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요즘 한국이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인데, 기독교인들이 자기와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을 험악한 언어와 행동으로 비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든 사실의 참과 거짓을 떠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할 성도들이 그런 비 생산적인 일에 몰두 할 상황은 아니라 사려 됩니다. 글은 곧 그 사람의 마음과 삶의 표현이라고 어떤 분이 말씀했습니다. 잠언 15:1,2,4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온량한 혀는 곧 생명 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조선시대에 유명한 제상이었던 '황희 정승'에게 어느 날 하인이 찾아와 다른 하인과 다투었다 면서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황희 정승은 그 이야기를 다 듣고서는 '네가 옳다'고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하인은 의기양양하게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와 다툰 다른 하인이 황희 정승을 찾아와 자신이 옳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정승은 그에게도 '네가 옳다'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 하인도 의기양양하게 돌아갔습니다.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부인이 황희 정승에게 따졌습니다. "아니 둘 중에 하나가 그르거나 옳은 것 같은데, 대감은 왜 줏대도 없이 둘 다 옳다고 하십니까?" 그러자 황희 정승은 '부인 말도 옳으이'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말이란 사람을 찌르는 무기도 될 수 있고, 치료하는 약도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말을 함부로 하면 무기가 되어서 상대편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말을 겸손하게 사용하면 상처난 사람을 치료하는 약도 됩니다. 말로 입은 상처는 수술도 않되고 약도 없습니다. 속담에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황희 정승은 어떠한 사람에게도 상처주지 않고 용기를 주고자 했습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고, 품위이고, 신앙입니다. 엡4:29절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벤자민 볼름은 “언어 환경이 물질환경보다 중요하다”
삼상25장을 보면, 다윗의 군사들이 나발의 목자들을 보호해 주었는데, 다윗이 나발에게 군사들이 먹을 양식을 구하자 나발이 이를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군사를 동원하여 나발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 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남편을 대신하여 용서를 구했습니다. "나발은 미련한 사람이니 상관하지 마십시오.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피를 흘리지 마십시오"하고 아비가일이 용서를 구했을 때, 다윗은 마음의 분노가 가라앉아 나발을 치지 않았습니다. 후에 남편 나발이 갑자기 죽어 아비가일이 과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용모가 단정하고 친절하고 말을 잘하는 지혜로운 여자인 아비가일을 불러오게 했고, 아비가일은 다윗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결론: 성경의 기록자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세밀하고 감격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사람이 사도요한입니다. 요한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에서 ‘내 사랑’ ‘테 아가페 테 에메’는 ‘내 것인 그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느 누구나 사랑한 것처럼 나도 어느 누구나 사랑해야 합니다.
February 23, 2025
본문: 요한복음 8:1-11
예수님의 땅에 쓴 글씨
서론: 지금부터 23년 전인 2002년에 그 당시 복음 송 가수였던 Michael Card에 쓰여졌던 ‘Scribbling in the Sand( 땅에 쓴 글씨)’ 책이 있었습니다. 이 책은 78 pages의 불량이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감명을 주었는데, 그는 또 이제목으로 노래를 작곡도 하였습니다. 그가 쓴 노랫말 보다 이 책이 더 의미 있는 것은 그의 영감의 근원, 즉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 예수 안의 창조성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마이클 카드는 성경적인 토대 위에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창조성의 의미를 찾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창조적이라 여기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 모두는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따라서 창조성은 그의 제자되는 길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델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성을 아는 지식이 어떻게 겸손과 순종의 생활 양식과 연결되는지 보여 주고, 우리에게 예배와 공동체를 통해 창조성의 소명을 받아들이도록 도전하게 합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예수께서 모래 위에 두 번이나 낙서한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릅니다. 대체로 해석자들은 오랜 세월 잘못된 질문을 했습니다. 그들은 내용, 그가 무엇을 썼을지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들은 진짜 질문 즉 왜 예수님이 땅에 글씨를 썼는지 깨닫지 못한 채 무엇을 쓰셨겠냐고 묻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그가 왜 그렇게 했는 지입니다.
마이클 카드는 우리에게는 Amy Grant가 불러 유명한 찬양 “El Shaddai"의 작곡자이기도 합니다. 그가 이책을 토대로 작곡하여 부른 ‘땅의 쓰신 글씨’ 노래의 우리말 가사를 잠시 적어봅니다. “폭도들 한가운데 겁에 질린 여인이 홀로 서 있네. 돌에 맞아 마땅하다는 성난 외침 들리나 주님 곁엔 소리 없는 넉넉한 사랑만이 흘러 넘쳤네. 참으로 영광스러운 가르침을 행하시다 자기 의를 과시하는 경멸과 분노 앞에 마주하셨네. 몸을 굽히시사 태풍의 눈처럼 고요를 만드시며 음흉한 요구에 말없이 대답하시네. 흙 위에 끄적이실 때, 순간 속에 영원한 삶이 있네. 그것은 침묵, 그것은 음악, 그것은 예술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 몸을 굽히사 한마디 말씀도 없이 거대한 울림을 이루셨네. 십계명을 새기신 그 위대한 손바로 그 손가락으로 흙 위에 끄적이시네.”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예수님처럼」의 저자 맥스 루케이도는 "나는 마이클 카드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하게 된다. 또한 그와 함께 있노라면 늘 예수님이 생각난다. 마이클 카드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가장 탁월한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외에도 오늘 본문 말씀은 어떤 사회적 문제를 조명할 때 “누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라는 주제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이신 예수 그리스의 마음을 발견하는데. 여기에서 특별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서두에서 “예수께서 감람산으로 가시다”는 그 전날 밤이고 다음날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은 성전 뜰에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물론 성전 밖이지만 엄연히 이곳도 성스러운 곳입니다. 밤에 기도하시고 성전에 들어오신 예수님 앞에 간음 현장에서 붙들린 여자를 데려와 문제를 야기하는 그들은 이미 거룩한 신을 섬기는 모습이 사라진 간사한 종교인의 모습이 되어 살기를 품은 체 예수님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레20:10, 신22:22의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통하면 남녀를 다 같이 처형하라.” 인용하며 힐책하였습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살기가 등등하여 오히려 그들이 살인에 예수님을 끌어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가 거만해지면 더 무서운 일을 저지른다는 말이 있다. 요즘 한국이나 미국에서 유행하는 국민적 주제가 하나 있는데 ‘패권주의(supremacy)’ 라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헤게모니아(ἡγεμονία), 영어로는헤게모니(hegemony) 표현된다. 미국내에서 자신들이 세계 유일의 패권주의 국가가 즉,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이 자신이라 생각합니다. 심각한 것은 기독교파들 중 자신들만이 보수적 복음주의, 복음주의 기독교 우파라고 주장하며 이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미국을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한 청교도들처럼 미국을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펼치기 위한 선택된 백성이라고 믿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들의 패권주의에 즉, 미국의 세계지배에 위협이 되는 반미주의적인 정치세력과 국가들은 폭력으로 짓 밞아야 한다고 믿는 반 평화적인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땅에 쓰셨던 예수님은 왜 갑자기 땅에 무언가를 쓰셨으며, 주께서 땅에 쓰셨던 내용이 무엇이었을까? 많은 신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성도에게 불의에 항거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돌아 보눈 것이다. 예수께서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를 쓰신 이유는 그들에게 시간을 주기 위함이다. 자신들을 돌아볼 그 시간들을 주시기 위함이다. 영국 격언에 침묵도 또한 답이다. 신학자 제롬은 이때 예수께서 땅에 쓰신 글이 율법 중에 돌로 쳐서 사람을 죽일 죄목이 아니었을까 추측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몇 초기 사본에 보면 “그 여자를 송사한 저들의 죄와 모든 남자의 죄” 말이 설명에 첨가 되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둘째, 격분한 마음을 가지고는 신앙적인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지식을 가졌고, 현인이라도 그 속에 격분한 마음이 있으면 잘못된 말과 행동이 표출됩니다. 본문에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되어있는데 ‘죄 없는 자’를 의미하는 ‘엔아마르테토스’ 이곳에 만 나타나는 단어로 “단지 죄를 범하지 않은 정도가 아닌 죄를 지을 욕망까지 없는 상태를 말한다고 Bernard 와Plummer 주장한다.
셋째, 그리스도인에게 용서보다 선행되는 것은 정죄하지 않는 것이다. 헬라어 본문에 ‘카타크리노’라고 표현 되어있는데 ‘정죄’라는 의미이다. ‘심판’을 의미하는 ‘크리노’ 조금 다른 의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직접 관련이 없는 타인의 잘 못을 보면 먼저 자신은 누군지 모르는 듯 정죄에 열정을 갖는다. 그에 대해 불쌍이 여기는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마음이다.
결론: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이 회복하는 인간이 해야 할일은 하나님의 마음을 해아리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다해아릴 수 없다. 우리는 주님과 대화하며 주의 마음을 해아리는 것이 영적자녀로 우선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 한다. 우리 부모님에게 우리가 그 은혜를 다 해아릴 수도 보답할 수 없는데, 우리 주님의 뜻을 어찌 다해아리겠는가? 우리가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는 있다.
February 16, 2025
본문: 디모데전서 6: 5-12
작은 꿈을 꾸는 사람
지난 주에 있었던 NFL의 결승인 수퍼볼(Superbowl)에서 필라델피아 이글스가 우승 컵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 결승전의 MVP는 젤른 허츠(Jalen Hurts)라는 선수가 받았습니다. 그는 2년전의 수퍼 볼에서는 준 우승에 머물렀습니다. 2년전 CBS가자와의 인터퓨에서 "저는 모든 것의 중심에 항상 하나님을 두고 있습니다. 저는 그분께 모든 찬양을 드리고, 항상 그분께 의지합니다. 그리고 저는 모든 것이 제 뜻대로 전개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믿는 것입니다. 저는 성장하고, 배우고, 그저 성숙할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기에 계셨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팀에서 2인자의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다 보니 오늘 영광스러운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프랑스의 축구 선수인 음바페는 8년 전 월드컵에서 우승을 한 후 모 방송 인터뷰에서 기자가 “당신이 축구선수로서 가장 닮고 싶은Raw model로 생각하는 역대 선수가 누구이냐?”고 묻자, 그는 아직 선수 생활을 하고 있는 ‘Christiano Ronaldo’라는 선수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펠레나 마라도나, 메시가 아니고 그 선수냐고 물으니 두가지 이유를 말했습니다. “첫째는 그 선수는 자기와 같은 position의 선수이고, 그리고 내가 그 선수처럼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펠레나 메시는 이미 신의 경지에 들어선 선수이기에 내가 범접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의 꿈이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완신 완인’이시기에 우리가 도저히 근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조금 작은 꿈으로 우리의 Raw model을 삼아야 합니다. 한국인으로 세계적인 Ballerina이며 국립 발레단장인 강수진씨가 어떻게 세계적인 Ballerina가 되었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큰 꿈을 한번 꾸는 것 보다 작은 꿈을 매일 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어떤 작은 꿈을 꿀 수 있는지 생각하고 적용해 보겠습니다.
먼저, 작은 꿈을 꾸는 사람은 자기의 하루의 삶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6절) 감사의 조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족 마음입니다. 빌4장11이후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능력’이란 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의 꿈보다 사람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9절). 물질을 얻는데 집중하면 사람을 잃기 쉽습니다. 삼상 18장 이하에 유명한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윗과 요나난의 관계속에서 다윗의 위대한 면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나단의 인품과 삶을 자세히 보면 다윗보다 훈륭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좋은 사람을 얻기위해 자신의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에 대해 맹목적인 우정이 있었지만, 또한 다윗 죽이려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잘 지키어 가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셋째, 매일 조금씩 새로워져가야 합니다(11절). 고후 4:16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라고 했는데 의와 경건은 영적인 삶, 믿음과 사랑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삶, 그리고 인내와 온유는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6가지를 날마다 조금씩 새롭게 해야 합니다
끝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가야 합니다(12절). 이것은 작은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를 저주하지말고 기도하며, 영적인 양식을 개을리 하지 아니하며. 내 인생의 결승 지점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자주 듣는 찬양 중에서 Josh Wilson이 부른 ‘Dream small’이라는 찬양이 그 가사를 잠시 적어 봅니다.
“주님께 대한 찬양을 늘 드리는 엄마, 그리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아빠는 세상을 잘 감당할 수 없다고 어떤 이가 말합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순간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여기 조그마한 교회 목사가 있습니다. 부서지고 상처 입은 40년 동안의 사랑 이 단순한 순간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작은 꿈을 꾸세요. 거짓을 말 하고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려 하지 마세요. 당신이 있는 곳에서 예수님이 당신을 사용하게 하십시오. 하루 하루 잘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하십시오. 당신만이 도울 수 있는 작은 방법을 찾으세요. 주의 크신 사랑으로. 작은 돌이 거대한 것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작은 꿈을 꾸세요. 그것은 길 건너에 있는 불쌍한 미망인을 방문하는 것입니다. 또는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친구와 함께 금요일에 즐거운 시간이 되어줍니다. 이 단순한 순간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물론 더 큰 꿈을 갖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큰 일을 하기 위해 가는 길에 놓인 작은 순간들을 놓치지 마세요. 이 단순한 순간들이 세상을 바꾸니까 그러니 작은 꿈을 꾸세요 거짓말로 당신은 모든 것을 얻으려 하지 마세요. 당신이 있는 곳에서 예수님이 당신을 사용하게 하십시오.
그러니 작은 꿈을 꾸세요. 계속 사랑하고, 계속 섬기고, 계속 듣고, 계속 배우세요. 계속 기도하고, 계속 바라고, 계속 구하고, 계속 구하십시요. 작은 것을 더하고 더 커지는 것을 지켜보십시오. 만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강에서 바다를 만드십니다. 하나님과 남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당신만이 도울 수 있는 작은 방법을 찾으세요. 그 크신 사랑으로. 작은 바위가 거대한 추락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요, 보라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우리 주가 함께 하시면 그들 모두를 먹일 수 있습니다.”
“하루에 십분씩 하는 연습이 30년 후의 나의 꿈을 이루었다”라는 어느 발레리나의 고백처럼 우리는 작은 꿈을 꾸며 성실하게 주녀 자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작은 꿈을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 도립니다.
February 9, 2025
본문: 고린도전서 9:19-27
최고의 삶과 최선의 삶
서론: 오늘은 미국에서 가장 큰 sports 행사중의 하나가 있는 Superball Sunday입니다. 2024년 Superball에 1억 2,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작년 경기를 시청했는데, 이는 슈퍼볼 시청률 기록이자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입니다. 인구조사국 데이터에 따르면, 2024년 2월 기준 미국 거주 인구는 3억3880만명으로 추산됐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인구의 30%이상이 작년에 이경기를 관람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대단한 것을 지칭할 때, 그 앞에 ‘수퍼’란 단어를 붙입니다. ‘수퍼 마켙’ ‘수퍼 컴퓨터’ 요즘엔 ‘Super AI’까지 있습니다. 3년전 한국에서 개봉된 ‘최선의 삶’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임솔아라는 작가가 2015년에 쓴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지만 우린 충분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 어른이라 생각했던 고등학교 소녀들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전부라고 느꼈던 친구들과 함께 모든 걸 차가운 길바닥에 내던질 수 있었던 무모한 그때, 소녀들은 나의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보통 우리 삶에서 ‘최선의 삶’이란 의미는 내게 주어진 환경속에서 그래도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해서 가는 길을 말한다. 그런데 본 소설에서 세 소녀는 자신들에 미래를 위한 최선이 아니라 지금 상항에서 임기 응변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원어적 의미로 ‘최선의 삶’이란 한 개인에게 주어진 여건속에도 최고의 선택(Most potential life)을 하며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마치 최고의 선을 추구하는(Most Valuable Life)삶으로 만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미래 지향적 삶 즉, 최선의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삶이 최선의 삶일까 상고하여 보겠습니다.
먼저, 최선의 삶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속에서 가장 소망이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먼저주신 권한은 다스림과 선택의 권한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미래의 소망이 아닌 현재의 즐거움을 선택했습니다. 선택한다는 것은 미래를 향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다음 시간, 다음 해 또는 그 너머를 살짝 엿보고 거기에 근거해 결정을 내린다는 뜻입니다. 우리 성도는 두번째 아담인 예수께서 가르치신 삶을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사는 최선의 삶의 추구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도 큰 유익을 줍니다. 동물원에서 태어난 코끼리의 평균 수명은 17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야생 코끼리의 경우 평균 수명이 56세입니다. 동물원에서 온갖 물질적인 안락함을 제공하고, 서식처를 가능한한 자연 상태에 가깝게 만들어줘도 야생 때보다 1/3밖에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가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해 가장 미래적인 것을 지향하고 살아가는 순간에 우리의 육과 영이 더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셋째, 때때로 가장 고상하고 최상의 삶만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많은 사역자들이 성도에게 율법에 근거하여 완벽한 삶을 살라고 요구합니다. 성도의 삶속에 만나는 환경에서 차선의 해결책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완벽한 신앙의 선택만 하다가 오히려 상처만 받는 삶을 살 때가 있습니다. 흔한 예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은 세상문화와 갈등속에서 갈등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인 성도들은 확실한 그리스도인의 문화가 정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너무 고지식한 신앙만 고집하지 말고 미래적이며 긍정적 차선의 선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화) 닥터 킨슬러의 스포츠 관람.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성도로서 주안에서 살아야 할까요? 우리 성도가 최선의 삶을 살기위해 세상에서 가장 명약인 구약과 신약을 사용해야 합니다. 성경 속에 우리 주의 자녀들이 선택해야 할 수만가지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문건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뽑아들어야 주의 우리를 향한 미래적 문건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그 약속들을 하나님 앞에 제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큰 환란을 만나 정말 기도할 힘도 없을 때는 먼저 하나님이 자기의 지금의 상황과 같은 자에게 무슨 말씀을 주셨나 한번 찾아보고 그 말씀을 근거로 제시하고 하나님을 회유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환란을 만나면 기도할 때 자꾸 주께 “ 하나님! 입장을 바꿔놓고!” 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지말고 모세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을 꼼작 못하게 해야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여호와께로 부터 십계명과 언약의 말씀을 받는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드어 숭배하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려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여호와께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고 설득하며 소위 요즘 속어로 여호와 하나님을 말씀으로 “들었다, 낫다” 하였습니다.
또한, 자기희생적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본문 19-21에 부탁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10:23,24 “23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24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깁시다.
마지막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위해 절제하며 내 자신을 쳐 주께 복종하는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한다. 본문27절에서 원어에 ‘휘포피아죠’란 말은 고대에 노예가 말을 않들을 때 채찍으로 때려 넙죽 땅바닥에 엎드려 지도록 까지 거칠게 학대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의 최선의 삶은 때론 그리스도를 위해 가장 비참하게 낮아 질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소망 가은데 최선의 선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수퍼 볼 경기를 하는 선수들은 미국의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의 우승컵을 들어 올리기 위해 그동안 고통을 참으며 훈련했고, 이제는 자기가 가진 모든 능력을 쏟아 부어서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최선의 삶은 우리가 가진 소망과 미래의 구원을 위해 오늘 더 단련해야하며 주님이 부름시는 부르심의 상인 면류관을 위해 확실한 방향을 가지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딤후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의로우신 재판장인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정상 참작’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싸운 그 선한 싸움 그 자체와 경주를 마침과 믿음을 주를 향한 믿음을 지킨 것 그 이외의 공적은 별로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February 2, 2025
본문: 요한복음 11:33-44
그리스도인의 눈물
몇 해전 영국 런던에 사는 열 아홉 살 난 소녀아이가 운송회사와의 재판소송에서 이겨서 오십만 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10억 원을 손해배상금으로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와 같은 때에는, 그동안에 억눌러 왔던 감정이 폭발하면서 울게 마련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소녀는, 오랫동안 어렵게 끌어왔던 소송을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울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3년 전에 그 회사의 트럭에 부딪쳐서 머리에 부상을 당했었는데, 외모와 다른 곳들은 다 멀쩡한데도 불구하고, 그 후로부터는 울 수가 없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소녀의 형편은, 메말라가는 이 현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든 사람들의 상징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봅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애통하며 가슴 터지게 울 수밖에 없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매일 받아보는 신문기사의 그 한 페이지 속에서도, 가슴을 메어지게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저 멀리 아프리카의 그 어떤 곳을 생각할 것까지도 없습니다. 바로 내 주위에 불과 몇 집 건너 이웃에 슬픔과 고통의 일들이 쌓여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일들이 너무나도 자주 반복되는 사실들이기 때문에 이 많은 일들에 대해서 무감각해질 정도로 단련을 받아왔습니다. 한편으로는 또한 나의 성공과 부로 나가기 위한 경쟁들 속에서 매일같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너무나도 무감각해지고, 눈물도 메마른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확실히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대의 문화는 ‘우는 것’을 별로 반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조금이라도 울려고 하면 주위의 눈총을 의식해야 하고, 왜 우느냐고, 울지 말고 그치라고 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래도 여자 분들의 경우는 좀 더 자연스럽게 울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만, 남자들의 경우엔 그나마 눈물 한번 제대로 글썽이기 조차도 힘든 것 같습니다. 저만해도 어려서부터 ‘사내자식이 왜 우느냐고, 남잔 울면 못쓴다’고 하는 이런 말을 들으면서, 아주 쇠뇌를 받다시피 하면서 자라났습니다. 사실 우리는, 큰 과오에 대하여 울며 신음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선지자들의 시대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그런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우리들 자신의 마음도 그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눈물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과 요셉도, 모세와 다윗과 엘리야도, 베드로와 요한과 바울도, 그 밖의 대부분의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경은 바로 우리 예수님이 ‘통곡의 사람―눈물의 사람’이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말씀 외에 히5:7은 우리 주님의 눈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서 ‘우셨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볼 수 있는 예수님의 눈물은, 바로 오늘 본문의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친구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전해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살고 있는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에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가 나흘이나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각각 따로 주님께 나아와서 좌절된 마음으로 통곡을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그를 어디 두었느냐?” 그들이 “와서 보옵소서” 하고 무덤으로 안내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다음에 아주 장엄한 말씀을 읽게 됩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 우리 주님의 그 거룩한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눈물입니다. 이 예수님의 눈물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적어도 예수님의 이 눈물은 ‘자기 자 신의 슬픔’ 때문에 흘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 슬픔을 억제하지 못해서 우는 눈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바로 이점이 또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조금 후에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이적을 행하려고 하고 계시면서도, 또한 지금 죽어 있는 나사로가 조금 후에는 다시 살아나서 무덤에서 걸어 나오게 될 것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는 진정한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고, 주님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의 음성으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죽음에서 나사로를 불러내셨고, 나사로가 살아나서 무덤 밖으로 나오는 그때까지도 슬픈 예수님의 얼굴과 눈물을 보고, 주위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슬플 때 우는 것은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더욱이 슬픈 자와 함께, 그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눈물입니다. 우리 크리스찬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그가 가신 길을 가며, 그가 하신대로 따라서 사는,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들이 바로 크리스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님이 흘리신 이와 같은 눈물을 우리 크리스찬도 흘려야 하는는 것입니다.
우리 주의 말씀에 “애통하는 자들과 함께 애통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내가 그를 사랑하기에 그의 슬픔은 곧 나의 슬픔이 됩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기에, 그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 됩니다. 우는 자에게 있어서, 같이 울어주는 것보다도 더 큰 사랑과 위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사도행전8:2에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한 통곡이 첫 그리스도인 순교자의 죽음에 뒤따른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 9장 39절에 보면, 신실한 여인이었던 도르가가 죽었을 때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드로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나누기위해 슬픔을 나누고 눈물을 나누는 것은 주님을 닮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다와 함께 우셨던 것처럼, 우리가 슬픔을 당할 때에 우리와 함께 우십니다. 모든 슬픔의 순간들에 보이지 아니하는 ‘애도자’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친했던 자에게 이 세상을 하직하는 마지막 인사를 할 때에, 우리와 함께 마음아파하시고, 함께 눈물을 흘리십니다. 우리 주님은 이와 같은 분이십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우신 것은,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 보시면서였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종려주일에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호산나를 외치는 많은 무리들의 환호소리를 들으시며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며 울기 시작하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군중들이 ‘호산나’ 하고 외치지만, 이제 며칠이 못 가서 바로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고 외쳐댈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들을 보시며 우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울다’란 동사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시며 우신 것을 뜻하는 ‘에닥크루센’과는 다른 동사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크게 우는 것을 뜻하는 단어인 ‘엑클라우센’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예수님께선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소리 내어 우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너를 품으려 한 것이 몇 번이더냐?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성’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를 보면, 거기엔 결코 평화라곤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여러 번 함락되고, 부서지고, 재건할라 치면 또 다시 함락되고 파괴되었었습니다.
‘평화의 성’이란 이름을 가졌지만 평화가 없었고, 여러 번 정복되고 함락당하는 것은 무척이나 슬픈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러 오셨지만,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조롱했고,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한 기회가 이제 주어졌지만, 사람들은 ‘평화의 왕’을 알지를 못했습니다.
세번째, 흘리신 눈물은 잡히시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 기도하시며 흘리신 것입니다. 바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흘리신 고뇌의 눈물이셨습니다. 우리는 로마서 7: 23,24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자신내면 적 모순과 싸우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상가가 말하기를 “인간에게 있어 최상의 기쁨의 표출은 환희도 포효도 아니고 그 사람의 흘리는 눈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기쁘면 기뻐 날뛰는 것이아니라,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January 26, 2025
본문: 역대상 4:9, 10,
마태 6:5-13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
서론: 한 해가 시작되고 오늘이 네번째 주일이 되었고, 이번 주 수요일은 우리 한국의 가장 큰 고유의 명절인 설날입니다. 년초가 되면 우리의 한 해에 대한 바램과 소원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들은 과연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해야 하며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지난 10여년동안 자주 읽고 묵상하는 성경의 기도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낭독한 역대상 4장 10절의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부르스 윌킨슨’ 이란 분이 쓴 책으로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서 이 책으로 일정 기간 동안 묵상하고 성경 공부도 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 본문을 보면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역대상의 저자는 우리에게 유다 자손들의 족보를 충실하게 알려주면서 이 지점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모든 이름들 한 가운데서 그는 야베스에게 이르렀고 우리가 야베스에게 주목하기를 원했습니다. 성경의 야베스 고작 두절 밖에 나오지 않지만, 야베스는 참으로 신실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야베스란 원래 이름의 뜻은 ‘높은 자’ 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9절을 더 묵상해야 합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의 의미처럼 땅에 속한 낮은 기도보다 높은 곳을 지향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10 절에서 나오는 ‘지경’은 우리의 영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마태 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도는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은 효과적인 기도의 비결을 알고 싶어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가장 효과적인 기도의 비결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은밀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좋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늘 물러가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했습니다(눅 5:16).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큰길이나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기도한 것과 크게 대조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기도하며 보상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마태 6:6에도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기도와 묵상의 관계를 아는 일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성경 말씀을 섭취한 만큼 성경의 영감을 받게 된다. 성경 말씀은 묵상의 영양분을 공급하며 묵상은 우리의 기도를 힘있게 한다. 성경에 대한 묵상은 의미 있는 기도를 드리도록 도와줍니다. ‘묵상이 성경 섭취와 기도 사이의 연결고리다.” 라고 말한 사람은 도널드 휘트니(Donald Whitney)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만약 복음 지도자 조지 뮬러의 기도 생활에 비결이 있었다면 묵상과 기도의 연관성을 발견한 것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셋째, 기도를 위한 은밀한 장소를 찾는 것입니다. 기도 장소란 이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소음)를 차단하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음성(복음)만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장소이다. 위치가 어디냐보다, 동기부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산만하게 하는 세상의 거리보다는 좀 더 구별된 장소여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골방, 교회 또는 조용하고 집중할만한 특정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좋습니다. 흔히 산상기도나 기도원을 찾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무엇을 구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잘 아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기도를 많이 드렸고, 기도의 비밀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남북 전쟁이 시작되어 많은 병사가 죽어갈 때마다 동족을 잃는 쓰라린 아픔을 안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가 이끄는 북군은 병사의 숫자가 많고 또 여러 가지 여건상으로 보아 다 유리했지만 남군의 용장 로버트 리 장군 때문에 늘 패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루에 두세 시간씩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북군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대통령을 위로했습니다. 한 교회 대표가 링컨에서 다가와 말했습니다. "각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북군의 편이 되셔서 북군이 승리하게 해달라고 날마다 눈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자 링컨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우리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항상 하나님 편에 서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넷째, 기도의 내용은 자신을 위함보다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요소가 많습니다. 오늘 역대상 본문에서 야베스는 기도의 서두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부르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신약본문인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서 ‘나’라는 말은 없고, ‘우리’라는 말이 7번이나 나옵니다. 기도는 나 자신을 위해 드리는 것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이 시점에서 에스라의 기도 같은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에스라 9:6-15말씀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배반하였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 보다 형벌을 경하게 하시고, 이 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일을 행하는 족속들과 연혼하오리이까 ? 그리하오면 주께서 어찌 진노하사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 없도록 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롭도소이다.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인하여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라고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우리 삶에서 드려야 할 기도가 또 하나 있습니다. 1998년에 나왔던 노래 ‘기도( The prayer)’라는 성가 곡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안드레아 보첼리’와 ‘셀린 디안’이 불러 잘 알려져 있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나는 주님이 우리의 눈이 되어 주셔서 우리가 가는 곳을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때에 우리가 현명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이 찬송이 우리의 기도가 되게 해 주세요. 당신의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십시오 우리가 안전 할 수 있는 그 곳으로. 우리가 주의 빛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 마음에 품게 해 주세요. 매일 밤 별이 반짝일 때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게 하여 주세요.
우리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 하루를 채울 때 큰 믿음으로 우리가 이기도록. 우리가 그 평안한 곳에 이르도록 당신의 은혜로 우리를 인도해 주세요. 우리가 평안 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세요. 우리는 더 이상 폭력이 없고 정의와 희망이 있는 세상을 꿈 꾸고 있어요. 우리가 이웃의 손을 잡고 삶이 친절하고 평화와 형제애가 가득한 세상을 꿈꾸길 바랍니다. 주님이 주신 힘으로 우리삶이 평화로워 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늘 위에서 우리를 지켜봐 주소서. 우리 각 영혼이 사랑을 찾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당신 곁에서 사랑할 또 그 안에서 사랑할 또 다른 영혼을 찾도록 이것이 우리의기도가되게하십시오. 모든 아이들처럼 순수함으로 그곳를 찾을 수 있도록, 당신의 은혜 많이 우리를 인도해 줄 수 있어요. 우리가 안전 할 수 있도록 믿음을주세요.
January 19, 2025
본문: 요한복음 5:1-10
주님의 시선으로
한 젊은 병사와 결혼해서 아리조나 사막 같은 광야에서 살게 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황량함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마침내 친정 엄마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엄마, 저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 메마른 사막이 너무도 싫어요. 이곳은 사람이 살기에 끔찍한 곳이에요. 눈에 보이는 것이라 곤 붉은 황토와 가끔씩 보이는 선인장과 뜨거운 태양 뿐이여요.” 얼마 후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다음과 같은 아주 짧은 답장이 왔다. “사랑하는 딸아, 어떤 두 사람이 자기들이 갇힌 감옥의 철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고 있었단다. 한 사람은 진흙을 보았고, 다른 한 사람은 별을 보았단다.” 어머니가 보내준 글의 의미를 깨닫게 된 그녀는 진흙이 아닌 별을 찾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사막의 꽃인 선인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근처 인디언의 말과 풍습과 전통을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사막에 관한 전문가가 되어 좋은 책을 쓰기까지 했습니다. 끔찍한 사막이 행복한 연구의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그 이유는 사막이 바뀐 것이 아니라 사막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 은 예루살렘 복 동쪽에 위치한 양문 곁에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은혜의 집’또는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연못가의 38년된 중풍 병자는 예수님을 만나 그의 인생 전체가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그가 주님으로부터 중한 병을 치유 받은 사실보다 더 중요한 사실들을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를 향한 주님의 크신 인자와 자비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38년된 병자에게 3가지의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첫째는 “일어나라”, 그리고 둘째는“네 자리를 들으라” 셋째는 “걸어 가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가 발견한 몇 가지 교훈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째, 우리의 신앙의 첫째는 주님을 먼저 만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병자는 주님을 만나 서 그가 가진 문제들을 해결 받을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38년 된 중풍병자 주님에게 치료를 받기 전 주님과 시선이 마주쳤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를 보시고 그가 오랜 병상에 있었음을 측은히 여기셔서 그를 향해 “내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때 그가 주님을 바라보며 자기의 낫고자 하는 의지는 있지만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간다고 푸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를 불쌍히 여신 주님은 그를 향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명하셨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기전에는 피조물인 천사를 의지했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나타나 자기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 구세주 예수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기를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는 불평만 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만왕의 왕, 만주의 주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더 믿습니다. 이런 한갓 피조물에 자신을 드리고 정성을 쏟아 붓습니다.
둘째, 우리의 신앙은 어떤 시선을 가지고 누구를 보고, 무엇을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눈 바꾸는 훈련이라고도 합니다. 세상의 그 영화나 유튜브 만 바라보던 눈을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두는 훈련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집중하던 눈을 의와 평강과 희락을 구하는 눈으로 바꾸는 훈련입니다. 성공적인 신앙생활은 시선을 예수님께 두고,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주님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포함하여 주변 사람과 직면하는 문제와 세상을 바라보는 훈련이 신앙생활입니다. 이 시선을 놓치는 순간 신앙생활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사실 본문도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셋째, 우리 삶에 있는 문제들은 오직 우리 주님만이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시적 우리에게 만족과 기쁨을 주는 것을 의지합니다. 오늘 본문 38년 동안 고생했던 병자는 예수님께 육신의 병을 고친 것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영생을 주시는 구원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요한11장25,26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넷째,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긍휼한 눈으로 바라보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38년 동안 중병으로 고생하다 나은 사람을 향해 진심 어린 마음의 축하가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 범했다고 질책하며, 또 그 병을 고치신 예수님을 시기 질투하며 미워합니다. 때로는 신앙인들이 교만하고 목이 곧아서 긍휼에 풍성한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위에 서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적용: 한국과 이곳의 우리들은 과거에 비해 풍족하고 평안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아직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경제적 고통에 시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바라보았던 예수님의 신선을 가지고 여러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아야하고 그들에게 온정의 손길을 건네야 하겠습니다.
시편17:8에 “주의 눈동자처럼 나를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나를 숨기시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전승에서 이 말의 의미를 해석하면 “눈동자처럼 지키신다”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영어 성경에 “the apple of your eye”라고 쓰여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 서로 가까이 서서 서로의 모습이 상대방의 눈동자 속에 조그만 하게 비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가까이서 지켜보시며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38년된 병자를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시며“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처럼 주님의 시선은 우리를 향하십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시선에 우리의 눈을 맞추어야겠습니다.
January 12, 2025
본문: 시편 62:1-8
우리의 피난처와 산성이 되신 하나님
서론: 금년의 두번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하나 꼽으라고 하면 단연코 ‘은혜’일 것입니다. 이 은혜를 구할 자격이 우리에겐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값없는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단어인 은혜를 히브리어로 은혜는 ‘헤세드’라 합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가 가장 먼저 언급되었던 곳은 창세기 19:1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기에 앞서 롯에게 먼저 찾아가 그 사실을 알렸을 때, 롯은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천사가 롯에게 보여준 “호의”를 헤세드라고 합니다. 은혜, 즉 헤세드는 어떤 보상을 바라고 베푸는 동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신 조건 없는 사랑을 뜻합니다. '헤세드'는 '은혜,긍휼, 자비, 인자'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헤세드'는 '하싸드'라는 '사랑하다', '연모하다' '자비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유래되었고, 하나님의 열심, '친절', '은혜', '인자', '자비’, ‘은총', '긍휼' 등을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헤세드(은혜)'는 에메트(진리)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기초를 이루는 중요한 진리의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독생자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나타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은혜'가 바로 '헤세드'이기도 합니다.
구약 시편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표현하는 형상이 있는데 그것은 ‘산성(fortress)’ ‘요새’ ‘피난처’입니다. 우리가 옛날의 산성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높은 요새 지역에 견고한 돌성이 둘려져 있고 성곽이 있고 망대가 있는 곳이 바로 ‘피난처(refuge)’ 산성 입니다. 힘과 보호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설명하는 비유로 이 말이 특히 시편에는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62편1-8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의지하는 주의 백성에게 다가오는 환란 속에서도 우리를 지키시는 산성이요 요새이신 주의 도우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내용을 요약하면 3가지가 있습니다. 1,2절은 구원의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고 있고, 3,4절은 핍박속에 있는 의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5-8절은 본문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 즉 ‘헤세드’를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자녀에게 고난은 늘 찾아오지만 그것들 앞에서 의연하고 견고히 서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사악하고 거만한 자들의 음모와 핍박에 정면으로 부딪치며 대적하였습니다. 그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을 굳게 잡고 의연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연약한 인간이어서 흔들리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이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았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의롭게 살다보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흔들리는 울타리와 넘어지는 담’으로 보일때가 많다. 그들의 눈엔 의인이 연약해 보이고, 세상에 공격에 금방 무너질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요한17:4을 보면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삶, 그리고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삶에 모습을 보면서 위로를 얻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의 삶이 늘 꺽이고 넘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왕성한 생명력을 주셔서 다시 일어서고 세상을 이끌어 왔습니다. 그 생명력은 갈릴리에서 지중해연안으로 그리고 세계로 퍼져 세계를 주도하는 역사가 된것입니다. 한 때 인도가 정신 세계가 심오하여 사상 세계를 이끌거라고 한사람도 있었고, 중국이 앞으로 세계를 주도 할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들의 역사가 아직도 세상을 lead해 나가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5:12 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의인의 삶은 사랑과 정의의 삶이기에 항상 악한자의 핍박을 받습니다. 본문 3,4절 보니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늘 악한 자들은 무리를 모아서 선하고 의로운 사람을 공격합니다. 의인들을 천지 나락으로 떨어뜨리려 합니다. 입으로는 ‘자유’니, ‘민주’니 하면서 속으로는 선한 사람을 질투하여 자기 소유나 지위가 위협받을가 근심하여 선한 사람을 저주하고 틈 만나면 공격합니다.
끝으로, 아무리 세상이 사악하고 혼란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구원하시어 그의 산성에 서게 하시며, 그의 백성을 피난처에 거하게 하십니다. 19세기 초 80편의 찬송시를 쓴 영국의 Henry Francis Lyte 목사님은 고아였습니다. 왕실의 자선 학생으로 Dublin Trinity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천식폐렴으로 평생 고생하였으나, 영국의 해변도시 브릭스햄에서 과격한 어부들에게 봉사하며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 받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찬송가 ‘십자가를 내가지고’ ‘찬양하라 내영혼아’를 썻습니다. 이에 반하여 비슷한시대의 사람인 Cecil Rhodes 는 영국인으로 남아프리가 식민 통치 수상을 지낸 사람입니다. 영국인과 남 아프리카의 보어인 간의 전쟁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 원인은 다이아몬드 광산을 획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아프리카의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이젠 모두 남겨 놓고 갈 수밖에 없다. 내가 얻은 것 중 하나도 가지고 갈 수 없다. 나는 영원히 존재하는 보물을 보지 못했고, 결국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노라.”라는 말을 남기고 48세의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결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을 살다보면, 고난을 만나며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시대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여러모양으로 고난을 겪으며, 때론 난감한 상황에 빠지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요16:33에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반드시 일으켜 세워 그의 산성에 이르게 하시며, 그의 피난처에 거하게 하실 것이다.
참고) 우리말 개역 개정 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여호와’로 7020회, 다음은 ‘하나님’이 4060회, 다음으로 ‘이스라엘’은 2468회, 다음으로 ‘예수’가1331회, 그리고 동사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사랑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이러한 통계 자료만으로도 성경이 어떤 책인가를 잘 보여 줍니다. 성경은 약 1500년동안 40여명의 기록자들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요한 3:16이 이를 요약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December 29, 2024
본문: 시편 90:4-12
자신의 삶을 계수하는 사람
오늘은 금년 2024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또 한 해가 우리의 길지 않은 삶 가운데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시편에는 7명 이상의 기록자가 나옵니다. 시편은 성경의 어느 책보다도 많은 저자들이 기록했습니다. 다윗, 아삽, 고라의 아들들, 솔로몬, 모세, 혜만과 에단, 그 밖의 인물 등 많은 저자들이 공동 저작하하였다는 문학 모음집입니다.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며 삼하23:1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의 노래를 잘하는 시편 기록자”인 다윗은 시편의 주된 저자입니다. 그는 150편의 시편 중 75편 즉 시편의 정확히 절반을 기록한 인물이라는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시편은 완성되기까지 약 1000년이 소요된 장기 프로젝트였고 모든 정경들 중 기록되는 데 가장 오래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기록자는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큰 인물 중의 하나인 모세가 기록한 시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말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우리를 흙으로 돌려보내지 마소서. "네 근원으로 돌아가라" 말씀하지 마소서. 참으로써! 주께서는 세상의 모든 시간을 쥐고 계십니다. 천 년이나 하루나 주께는 매한가지입니다. 우리 수명은 칠십 남짓합니다. 운이 좋으면 팔십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내놓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고통 뿐입니다. 수고와 고통과 묘비 하나가 전부입니다. 누가 그러한 진노를,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터뜨리시는 그 노여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오! 우리에게 제대로 사는 법을 일러 주소서! 지혜롭게 잘사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아마도 모세의 인생의 끝자락에서 지은 시일 것입니다. 인생을 뒤돌아보니 많은 수고와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묵상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갔다는 것도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젊을 때는 죽음을 생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어떻게 남은 삶을 보내야 할까 생각하게 되지요. 어르신들을 보면서 그런 모습을 배우게 됩니다. 모세는 날을 계수해야 지혜로워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며 언젠가 주님 앞에 설 날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수명이 점점 늘어나는 때이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티끌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겸손하게 이 사실을 인정해야 더 가치 있는 것에 시간을 보내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삶을 더 깊이 생각하는 것이지요. 주님, 하루하루 정신없이 사느라 삶과 죽음에 대해 잠잠히 생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때때로 잠시 멈추어 돌아보게 하시고 지혜롭게 잘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1절 - 4절 까지는 하나님의 시간, 5-12절 까지는 인간의 시간 즉 피조물의 시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시간 모든 인간의 시간도 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첫째, 영원한 시간입니다. 2절에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나님은 시간 안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며 공간적으로도 초월해 계시다는 것입니다. 출 3:14 “I am that I am.”처럼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모든 것이 그 분으로부터 연유되며, 스스로 존재하는 절대적 존재로서 시간과 공간까지도 지배하는 영원안에 숨어 계시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의 시간 속에 가장 중요한 시간은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시간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변화되어 갑니다. 인생에서 참 지혜를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삶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11절에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본문에서 모세는 주의 진노를 알고 두려워하는 두려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간의 삶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신 날을 계수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명령받은 우리는 우리의 삶의 날을 늘 계수하며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날을 계수한다는 의미는 날짜를 센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깊히 새긴다는 의미인것입니다. 지혜로운 자의 삶이란 그리스도를 통해 죄사함을 받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지시를 따라 사는 것을 삶인 것입니다. * 어제 한 한인 교회에서 homeless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그들에게 선물과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잠언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그런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신다.
“당신의 업적이 천하를 덮을지라도 겸양하는 마음을 가지라.” 우리는 무엇보다도 의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December 22, 2024
본문: 마태복음 2:1-12
구세주 탄생의 조연 자들
서론: 오늘 우리가 성탄 축하 주일로 지키는 주일에 지금으로2020년 전경 로마제국의 속국이 된 팔레스틴에서 탄생하여 인류의 역사의 중심이 되신 되신 한 왕의 탄생하였습니다. 그 탄생의 주위에서 하나님 뜻을 순종과 겸손, 헌신으로 화답한 진정한 조연자들과 악역을 담당한 조연자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 당시의 유대왕인 헤롯 대왕 안티파터는 하스몬 왕조를 무너뜨리고 B.C 63년 유대를 로마의 속국으로 넘긴 인물입니다. 그는 유대를 로마에 넘기고 로마로 가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정복한 지금의 서유럽(갈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하며 자신의 아들인 헤롯을 유대인의 왕(분봉 왕)으로 임명하도록 옥타비안 황제를 설득했습니다. 그리하여 B.C 37년부터 B.C 4년까지 유대를 다스리게 된 헤롯은 건축 왕이란 별명처럼 유대 곳곳에 크고 작은 건축물들을 많이 세웠는데, 대표적으로 로마 황제를 위한 ‘가이사랴’라는 신도시와 유대인들을 위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진행하여 로마와 유대의 환심을 동시에 사고자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유대는 이 헤롯 대왕이 통치하였으며, 예수님 가족이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갔다 다시 돌아올 때는 그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가 유대 지역과 사마리아와 에돔 지역을 다스렸습니다(마 2:22). 아켈라오는 매우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정치를 펼쳤기에 후에 참다못한 유대와 사마리아 귀족들이 로마 황제에게 대표단을 파견해서 그를 숙청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AD 6년에 아켈라오는 왕위에서 쫓겨났고, 그때부터 유대 지역은 로마 총독에 의해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적으로 BC 350 년 부터A.D 4년 까지를 ‘중간사’라 그리고 이 시대를 ‘암흑기’라 부른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로 기독교 역사의 잠복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의 상황 속에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지난 12일에 개봉한 기독교 영화 “I Am the Immaculate Conception”가 있습니다. 1545-1563사이에 있었던 트렌트 공의회는 마리아가 원죄의 오염에서 면제되었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주일에 2020여년전 구주 예수의 탄생에서 가장 선하게 희생적인 삶으로 주께 기여한 사람들과 악한 역할을 한 사람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선한 조연을 한 사람들이 입니다.
첫째, 마리아와 요셉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를 감당하게 힘든 역활을 주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들은 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마리아는 그시대에는 도져히 용납되지 않았던 처녀의 몸으로 정혼한 남자의 아이가 아닌 혼외의 임신을 강당해야 했습니다. 요셉 또한 자기가 정혼한 여자가 자기가 모르는 아이들 가진것을 받아드려야 했으며, 비록 천사의 지시지만 또 그 여인을 보호해주고 지켜 주어에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약혼녀가 정조를 잃으면 돌로치라 한것을 의롭고 선한 인격의 두면을 보여주려고 조용히 끊으려 했습을 본다. 그리고 천사의 고시에 손종하였다. 거기에다 두사람은 마리아가 만삭인데도 로마 황제명의 인구 조사에 응하기 위해 갈릴리 나사렛에서 다볼산, 에발산,그리심산, 감람산 등 산을 세계나 넘어 요셉의 고향인 베들레헴까지 긴여행을 해야 했다. 예수님의 탄생 후에도 해롯의 유아 살해를 피해 애굽까지 피신을 해야 했고 해롯 안티바가 죽자 나사렛으로 가야 했던 것이다.
둘째의 조연자는 동방으로 부터 별의 인도함을 받아 아기 예수께 경배키 위해 산넘고 물을 건너온 그들의 조력이다. 그들은 베들레햄 말 구유 위에 까지 찾아 경배한 분들로 누가복음의 목자들과 함께 성경속의 몇 안되는 사람들이다. 그들도 또한 예수님의 보호를 위해 헤롯의 감시를 피하려 잠행을 하며 본국으로 바쁜 발거름을 해야 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는 예수님의 탄생에 와서 경배를 했던 성경속의 사람들은 다 비 종교인이며, 자기의 전문적 일에 충실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동방의 박사들이 그랬고, 들에서 양치는 목자들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9:6,7에 예언한 그 말씀을 환상으로 본것입니다. 여기 말씀에 “한 아기 우리에게 낳고(born)”는 인성을 나타내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given to us by God)는 신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탄생한 아기 왕께 경배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하고 예루살렘을 먼저 찾아 왔습니다. 황금은 잘 알려진 바로는 음이온의 작용으로 신진대사를 촉진하고 혈액순환을 도와 건강한 피부를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향과 몰약은 광야의 오지에서 자라는 감람과나무의 천연수지로 채집이 어렵기 때문에 귀하고 값비싼 약재이다. 이것들은 고대부터 이스라엘과 이집트, 중세유럽 귀족들의 미용과 피부질환 치료에 사용되어 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헤롯과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미가서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에 의거하여 메시야가 나실 벧을레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동방 박사(Biblical Magi, Three Wise Men, Three Kings) 또는 마구스(magus; 복수: magi)는 기록에 따르면 예수가 탄생하고 나서 얼마 후 베들레헴까지 직접 찾아온 것으로 알려 진파르티아로 추정되는 동방의 박사들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서 동방 박사로 번역된 헬라어 ‘마구스’는 마술사, 점성술사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별을 보고 그리스도요 유대인의 왕인 예수가 태어났음을 깨달았다. 마태복음서에 따르면 별은 먼저 이들을 헤롯왕에게로 인도했고 이후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고 황금, 유향, 몰약을 선물한 후 헤롯 대왕에게로 다시 가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는 결국 다른 길로 귀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오클라호마 대학의 종교학과 교수인 브렌트 란다우(Brent Landau)는 ‘동방박사의 묵시’라고 불리는 성탄절 이야기를 2011년에 소개하였습니다. 시리아 사본에는 동방박사의 신비로운 기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다. 반짝이는 별, 베들레헴으로 동방박사들을 인도하는 기적적인 이야기들, 아기 예수님을 경배한 박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 고국에서 그들의 형제와 이웃들에게 기독교의 믿음을 전한 이야기, 그리고 도마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동방박사의 묵시’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탄생에 악역의 약할을 한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경은 거룩한 책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성경에는 부도덕한 사건 잔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런 셩경말씀을 통해서 두가지의 교훈을 얻는다. 부도덕하고 잔인한 사건에서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않된다는 가르침을 얻는 것이고 , 아름답고 성스러운 사실은 우리가 그것을 배우고 우리의 영과 몸에 익히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속에서 잔인의 극치의 역할로 등장하는 해롯을 보면서 우리는 결코 그런 인간이 되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영악한 정치 감각으로 예수를 로마 제국의 간접 통치자인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인물로 지목한 헤롯은 독재자가 권력 유지를 위해 흔하게 사용하는 무기인 폭력으로 예수를 없애려고 했지만, 이 사실을 안 예수의 가족은 이집트로 피신해 화를 면하였다. 많은 교회에서는 이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한 사건을 예수가 자신을 드러낸 사건으로 해석하여 주현절로 기념하기도 합니다.
결론: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성탄 주일에 2020년 전 이 땅에 구주 예수 탄생을 위한 ‘unsung hero’, 숨은 공로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구주 예수의 전파와 다시 오실 예수를 예비하는 진정한 조연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나 삶에서 주연자가 되려고만 하지 말고, 말없이 주의 나라를 확장을 위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는 성도가 되자. 만 왕의 왕 되신 나타내고 그분을 더 높이기 위해 자기는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는 그런 조연자가 되자.
December 15, 2024
본문: 이사야 11:1-9, 7:14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
오늘은 대강절의 세번째 주일입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들이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데 그 교리의 중점을 두고 있지만, 기독교는 신이 인간을 먼저 찾아왔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요한3:16에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때에”라는 말씀이 그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속에서는 그리스도의 탄생(성육신)으로 오셨음을 보여주고,미래의 사실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오실 것을 말하고,현재의 사실로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계속적으로 임재하시는 것을 다 포함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이 대강절은 성탄절과 그 시기를 같이하는 것이 마치 부활절을 전후하여 사순절과 오순절이 있는 것처럼 성탄절의 의미를 더 깊게 해 주는 절기인 점에서 유사점을 가집니다.
‘대강절'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그 어원적인 고찰을 하는 것이 한 가지 참고가 될 수 있습니다. 대강절에 해당되는 영어의 'Advent'는 라틴어 'ad(to)' 와 'ventire(come)'의 합성어로서,라틴어의 이 'ventire (오다)'가 역시 그리스도의 두 오심(ventire) 중에서 어느 하나를 가리키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으나,다만 현재로서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다 관련된 것으로, 또 하나 더한다면 성령의 임재까지 확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영어의 표기상의 차이로 보면, 'the Advent'로 쓰면 그리스도의 초림을 나타내고,'Advent'로 쓰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데, 라틴어로는 후자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지키는 또 하나의 절기가 있는데, 그것은 주현절(Epiphany)입니다. 예수의 신성이 많은 무리 앞에 나타나는 기간을 기념하는 것으로 1월6일 쯤되는데, 이것은 주로 서방교회에서는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 예수를 찾아 경배한 날을 기념하고, 동방교회에서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날을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본문은 1- 5절은 오신 예수님을 표현하고 있고, 6-9절은 오실 예수님의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나오는 이사야서는 35회 이상 오시는 메시야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인격 칭호, 사명들을 자세히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신약 본문에서 가장 귀중 단어인 ‘임마누엘’은 주님이 신으로서 우리 인간들 위에 나타나는 것 보다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주님이 먼저 찾아 오셔야지만, 우리와 함께 할 수가 있습니다. 대강절 셋째 주일에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임마누엘’ 의미가 우리에게 주는 큰 교훈들이 있습니다.
먼저, ‘성육신’이란 예수께서 우리안에 내재하기 위해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서에는 발견할 수 있는 것은 ‘God for us’였습니다. 하나님의 늘 인간 위에서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God with us’의 모습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셨습니다. 신이 우리 속에 거하시기 위해 벧을레헴 마굿간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갈릴리 어부들에게 그리고 세리와 창부들과도 함께하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께서 우리 위에 군림하는 것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둘째, 우리의 가장 힘든상황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 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41:10 이렇게 말씀하심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우리에게 환란과 역경이 몰아칠 때 우리와 더 가까이 우리와 함께 하심니다. 오늘 본문의 시대적 상황은 앗수루와 에브라임 연합군이 유다를 공격하기위해 전전을 펴서 다가오고 있었던 급박하고 암울한 상황이었다. 그때 이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태 28:20,21말씀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우리와 어떤 순간에도 함께 하시고 우리가 다시 일어서는 용기를 같게 하십니다. 자기가 믿음이 좋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난 앞에 있는 고난을 다 기적을 일으켜 다 치워 주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교훈은 우리가 고난을 함께 이겨내는 훈련을 하게하시고 그것을 이겨내는 힘을 주신다는 것이다. 예)가슴이 아파 낳은 아이의 간증.
셋째,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는 끝까지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의 자녀들도 각자가 작은 예수가 되어 연약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거해야 합니다. 우리한국 초대 교회사 문헌에 보면, 1897년 우리나라 서울의 최초 교회였던 정동 감리교회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문헌이 있는데,
“24일 하오 5시에 교우들이 새예배당에 모여 문표 일천장을 노나주어 교중 형제와 친구들을 청하여 찬미하고 기도한 후에 아펜셀러 목사가 잠깐 논설하고 여러사람이 기쁨으로 연보한 돈이 25원이라. 다음 날은 25일, 이날은 구세주의 탄신일이라. 오전 10시에기쁘고 감사한마음으로 새 예배당에 모여 찬미 기도하고, 아펜셀러 목사의 논설를 10년 전 기도제목과 함께듣는데 그분명한 말씀과 정론한 언론이 이치에 합당하고 추호도 차착이 없어 듣는이가 다 기히이 여기더라. 각기 일심으로하나님의 은덕을 찬송하고 열두시나 되어서 파하니라. 오후에 전날에 연보한 돈으로 남녀 교유중 빈한한 사람과 병든이들을 차등있게 분배하여 구제하고 저녁 7시에 학원들이 배제학당 회당앞에 등불 수백개를 거대한 십자가와 함께 공중에 높이 달고 아이들에게 실과를 주어 기쁜날을 표하니라.” 이 문헌 속에서 우리초기 교회의 선진들이 어떤 믿음의 아름다운 전승을 확립해 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믿는 성도에게 뿐만 아니라, 세상의 연약하고 굼주리고 헐벗은 그들의 모습 속에도 거하십니다. 예화) 미국 중부의 노부부의 겨울 저녁의 기도.
결론: 우리 성도는 주님의 크고 위대한 모습만을 고대하며 기다는 것보다 가장 낮은대로 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 뿐만 아니라 세상의 연약하고 소외된 그들과 도 함께하신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현재 우님은 우리 속에 그리고 내가 만나는 사람속에 그리고 우리 삶에 함께하고 계십니다. 2천년전 그때 오실 때처럼 지금도 주의 오심에 대한 대응이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지금 주님이 오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맞이할까 우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December 8, 2024
본문: 요한복음 1:9-14,16,17
주 전 그리고 주 후
우리가 사는 이세상의 문명이 닿는 모든 나라에서 역사는 B.C와 A. D로 나누어 계수하고 있습니다. 즉 Before Christ 와Anno Domini를 말하는 것입니다. AD는 Anno Domini의 약자로, 라틴어로 “주님의 해”를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추정 탄생일을 기준으로 연도를 세는 방식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우리 삶이 예수께서 내게 오시기 전과 오신 후의 삶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자리에 계신성도 여러분 또한 삶이 예수님을 만나기전과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삶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요한도 예수님을 만나기전 삶과 예수님의 부르신 후의 삶 많이 다릅니다. 요한은 그의 형 야고보와 더불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 아버지를 도와 어부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한1:35-40을 보면, 처음에는 세례 요한의제자로 있다가 예수를 따른 두 사람 중 하나로 나옵니다. 그리고 누가5:1에서는 그후 어부생활로 돌아 갔다가 마태4장, 마가1장에서 결정적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요한은 예수님의 수제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형과 더불어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들의 열심과 열정적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눅 9:54) 또 마가복음 5장의5병2어의 기적 9장의 변화산상의 체험, 14장의 겟세마네동산의 기도에 동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고난의 길에 동행하였고, 성모 마리아에 대한 주님의 의탁도 받았고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는 어느 제자보다도 먼저 달려갔습니다. 오순절이후의 베드로와 더불어 초대 교회의 설립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갈라디아2:9에서 사도 바울은 그를 ‘교회의 기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도미시안 박해 때 밧모섬으로 유배되어서 거기도 주님께 요한계시록을 계시받았습니다. 초대 교부 이레니우스가 전하는 바는 그는 천수를 누리다가 트라얀 황제 때 순교하였다고 합니다.주님을 만난 후 그는 이세상의 어떤 제자 보다도 놀라운 체험을 하였으며, 주의 많이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주의 은혜와 진리와 사랑을 전하였다.신학자 제롬에 의하면 그는 극히 노년에 이르러 에베소에서 청년들이 그를 의자에 앉혀 강대상에 올려주면 “소자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만 반복하였다고 한다.제자들과 교부들이 “선생님, 왜 같은 말을 자주 반복하십니까?”물으면 “이것이 우리주님의 교훈이시다. 그리고 이것만 행하면 족한 것이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대강절 둘째 주일인 오늘 저는 사도요한이 우리에게 전해준 하나님의 제2위시며,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 신학적, 철학적으로 표현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난 후 어떤 변화점이 있어야 하는지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기 전의 상태는 어떠하였고 주님을 내안에 맞이한 후의 나는 어떤 대조적 삶을 상아야 할까요?
먼저, 본문에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가 전에는 어둠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전 세상은 어둠에 잠겨 있었습니다(9절)본서에서 ‘세상(오이코스)’이란 단어가 본서에 80회 나옵니다. ‘세상(오이코스)’란 우주, 땅, 땅 위의 주민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곳을 뜻합니다. 이런 세상에 참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전 4,5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하였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내 안에 있는 나라 속에 임하셨습니다.9절에 각 사람은 단수형으로 All men이 아니라, Every(판타) men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신학자 Pulummer는 “하나님은 군중으로 서가 아니라, 각 개인으로 사람을 취급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한사람의 이름을 아시고 부르시며 우리의 각사람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십니다.
셋째, 그가 내 안에 오신 후 우리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나라를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변화시켜야 합니다. 예화)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고 변화된 스위스의 저명한 판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말 구유 위에서 탄생하시고 평생 머리 둘 곳도 없이 가난하게 사셨으며 우리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 때문에 교회의 종치는 일을 담당하였다.
우리의 변화는 세상의 혈통으로나 육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나는 것이다. 내 안의 성령 하나님이 주관하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의 우선 순위는 내게 나의 영적 변화를 위해 구하는 것이 먼저다. 내 안에 계신 영은 제2위의 하나님이시다. 성령을 오라, 가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주관하시도록 의탁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주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야 합니다. 은혜와 진리는 내가 전혀 공로 없으나 전적으로 내게 주시는 것이다. 예)화란의 선교사 코리 텐 붐 그의 언니 베스티가 리벤스부룩 수용소에 감금.
결론: 세상의 모든 역사가 주의 오시기 전과 오신 후로 확실하게 나뉘어져 있는데,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셨고 그의 나라를 소유하게 된 우리가 확실한 삶의 변화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참 빛이 임하기 전과 임한 후의 삶이 확실하게 구분되야 하는 것입니다.
December 1, 2024
본문: 누가복음 19: 41-44
평화에 관한 일들
오늘은 대강절(Advent)의 첫째 주일입니다. 대강절은 성탄절 4주 전 주일부터 시작되며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의 오심, 예수님의 도래를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대강절(Advent)은 도착(Arrival) 혹은 오심(Coming)을 의미하는 라틴 단어, Adventus에서 유래했습니다. 또한 대강절 첫 주일은 교회력의 시작이며,교회에는 첫 주일이기도 합니다.이처럼 예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대하는 즐거운 절기이기도 하지만, 예수의 오심을 위해 참회하고 준비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대강절은 2000년 전 예수의 오심을 준비하지만 현재의 우리 삶 속에 도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다시 오심, 즉 재림을 현재 대강절에서 준비한다는 신학적 의미를 가지기도 하는데,이사야9:6과 누가2:14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를 주시기 위함입니다.대강절 첫 주에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왜 이 땅에 오셨고 그를 따르는 우리가 평화에 대한 어떤 다짐을 하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겠습니다.
먼저, 평화에 관한 일을 고민해야 합니다. 본문41절에,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고 하였습니다.본문은 평화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에 관하여 무지했던 예루살렘 사람들을 보시고 크게 우셨습니다. 평화의 도시인 예루살렘에 평화가 없는데도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것을 보시고 탄식하셨다. 평화는 단순히 메시아를 기다림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평화는 주술적인 기원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평화를 기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는 주술적인 기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평화의 일을 고민해야 합니다.
예레미야23:17에서 예레미야는 평화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은 단순히 평화를 기원하였다.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두번째, 하나님의 통치를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42절에,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원어에 ‘헤 바실레이야 투 데우’라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며 탄식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불의한 백성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는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무지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당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하여 백성들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고 계셨다. 주님은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으로 인함이라”(43-44절)라고 경고하셨다. 의로운 백성에게는 평강을, 불의한 백성에게는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알았어야 한다.
본문에서 ‘보살핌 받는 날’은 여호와께서 ‘방문하시는 날’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을 이 날을 막연히 구원의 날로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날은 의로운 백성에게는 평화를, 불의한 백성에게는 심판을 내리시는 날이다. 막연한 기다림이나 주술적 기원은 아주 위험한 신앙형태다.
세번째,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온전하라는 것입니다.42절에,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이라 하였는데, 예수님은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헬라어의‘평화’(에이레네)는 ‘결합하다’(에이로)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주님과 인격적으로 결합하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인 전쟁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평화’(에이레네)는 구약의 ‘샬롬’에 해당한다. 그리고 ‘평화’(샬롬)은 ‘완전하다’와 ‘안전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즉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여질 때 누리게 되는 안전이다. 주님이 평화에 관한 일을 간략하게 말씀하신 것은 이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창17:1-2)라고 하셨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디카이오쉬네)와 화평과 희락이라” 고 롬14:17에 기록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온전히 의를 이루는 것이 평화의 길이다.
네번째, 의로운 백성에게 안전과 평강이 있습니다.43절에,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라 하였는데
불의한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방문하시는 날이 구원의 날이라고 생각하고 막연히 기다렸다. 그리스도의 강림도 같은 차원에서 정치적 메시아로 기다렸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이스라엘은 정치적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정치적 행보를 하지 않으시자 배신하였다. 그들은 잘못된 기대와 주술적 신앙으로 인하여 결국 쓴 맛을 보고 말았다.
예수님의 예언은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은 로마에 의해 완전히 함락되고 파멸되었다. 그의 말씀처럼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파멸되었다. 그들은 주님의 경고를 들었어야 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행하고 의로운 백성이 되었다면 심판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행하는 의로운 백성에게 평화가 있다. 시편의 기자는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체다카, rightousness)와 화평(샬롬)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시85:10에 노래하였고, “공의(체다카)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고 잠14:34에 쓰여 있다.
이 대강절 첫 주일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정한 평화를 알고 우리 삶에서 그 평화를 이루어가는 성들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November 24, 2024
본문: : 시편 126:1- 6
감사의 열매를 거두는 사람
오늘 본문을 살펴보니 이스라엘민족은 꿈꾸는 것 같은 기쁨을 누렸음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바벨론 제국에 의해 나라가 멸망당하고 70여년이 넘도록 전쟁포로의 비참한 생활 가운데 신음하던 이스라엘민족은 갑자기 꿈에도 그러던 조국땅, 가나안으로 귀국이 허락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1절) 라고 시편기자는 그가 동족과 함께 누린 감격을 꿈꾸듯 회상하고 있습니다. 126편은 바벨론에 끌려 갔다가 70십여년만에 되돌아온 유대민족이 성전을 올라가며 기쁨이 넘쳐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들은 전쟁포로라는 참혹한 상태에서 70여년만에 갑자기 되돌아오게 된 것인데, 바벨론을 무너트린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에 의해서 입니다. 남 유다 왕국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하고 대부분의 유대민족이 바벨론 제국에 볼모로 끌려가서 70여년동안 전쟁포로라는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을 때, 그 당시 신흥강국으로 부상한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에 의해서 이들은 극적으로 고국에 돌아오게 되는 믿기지 않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왜 고레스왕이 유대민족에게 자유와 국권을 회복시키는 놀라운 일을 행한지에 대해선 많은 추측이 있지만, 그 중심에 하나님의 깊으신 지혜와 권능의 손길이 있음을 우리 성도들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허락된 고난과 아픔이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폭풍우의 밤과 눈물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그 고통의 시간을 지나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그분의 강하신 팔과 선하신 뜻을 따라 건져 내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꿈꾸는 것과 같은 기쁨을 날마다 누리고 감사로 고백하는 복된 자녀의 삶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프랑스의 교육자이자 철학자인 <장자크 루소>는 이런 유명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Patience is bitter, but its fruit is sweet) 라고. 그렇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희망을 품고 그 어두운 고통의 터널을 지나 올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굳이 우리 크리스챤들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는 진리는 동서고금을 통해 인정하는 진리일 것입니다. 5절의“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는 말씀은 ‘인내하는 자가 값진 열매를 누린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중심적인 메세지는 단순히 ‘고생 뒤에 낙이 온다’ 든가 ‘인내하는 자에겐 열매가 있다’는 일반적 교훈을 뛰어넘어 진정한 감사의 뜻이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몇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고통과 고뇌의 시간을 통과한 후 나에게 주어진 것들은 더욱 소중하고 감사한 것입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참맛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인생의 쓰라린 맛을 알고 있는 사람 이야말로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 웃음, 설레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밖의 눈물의 정의를 내린 사람들의 말을 살펴봅니다. 영국 시인인 로버트 헤릭; “눈물은 눈의 멋진 언어이다.”, 눈물은 목소리가 없는 슬픔의 언어다(볼테르), 눈물은 우리가 갈망하는 모든 것을 바친다. (호메로스), 눈물만큼 빨리 마르는 것은 없다. (키케로) 우는 것도 일종의 쾌락이다. (미셸 몽테뉴)
둘째, 지금 나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나에게 가장 적당한 때에 주실 것으로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응답의 시기를 늦추시는 이유가 2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이 정하신 가장 적당한 시기에 응답하시는 것이고, 다음은 우리가 받을 요건을 갖추어질 때에 주시기 위함입니다.
셋째, 감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1997년 한국에서 많은 성도에게 읽힌 신앙서적이 있었는데, 그 책의 이름은‘하나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입니다. 한 일반 성도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아침에 5시간 이상 기도를 하며 기록한 책이었습니다.
넷째, 감사는 하나님께 만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나와 나의 있게 한사람과 단체들에게도 감사를 표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만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돌리는 것으로 그침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마음과 성품을 지닌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배푸십니다. 예)어머니를 찾아온 교회의 전도사와 Teenager들
오늘 본문에서 영감을 얻은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서 나오는 ‘희브리 노예들의 합창’에 나오는 마지막 가사의 한 소절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의 미덕을 깨우칠 수 있는 노래와 영감을 주시고, 고난의 미덕을 가르치소서”
끝으로,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아름다운 추수 감사의 절기는 403년전 청교도들이 플리마쓰에 상륙한 이듬해인1621년 53명의 청교도들이 병이나 사고로 인해 같이 온 형제, 자매들을 반 이상을 잃은 쓰라린 가슴의 상처를 부여안고 지킨 첫번째 추수감사제를 전승하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November 17, 2024
본문: : 요한복음 15:1- 8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성도
서론: 마카비 시대에 사용되었던 동전에 보면 포도나무가 새겨져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합니다. 포도나무로 표현된 이스라엘은 한결같이 불충성이나 진노의 대상으로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나는 참 포도나무요”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신앙적 실패를 배경으로하고 있습니다. 시편80:6 이하를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충실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엡1:23에서그리스도는 교회의 몸, 신자들은 그 몸 된 그리스도안에 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본문8절에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소년이 자기집 앞에서 그의 아버지가 기르는 말을 정성껏 쓰다듬으며 다정히 혼잣말로 말에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길가던 행인이 이를 보고 물었습니다. “너의 그 말은 참 잘 달리니?” 라고 물으니 소년은“이 말은 빨리 달리는 것보다 빨리 멈출 수 있어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도 멀리, 많이 그리고 빨리 가는 것 보다 잘못 갔을 때 잘 멈출 수 있고 돌이킬 수 있는 신앙이 훌륭한 신앙입니다. 십계명 중 오직 두 계명만‘하라’로 기록되어 있고, 나머지8가지는 ‘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다시 말해 ‘멈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성령을 헬라어로 ‘파라클래토스’ 라 하는데, ‘파라’는 ‘곁에’ 라는 뜻이고, ‘칼레오’는 ‘부른다’는 뜻입니다. 곁에서 콜해주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야구의 심판처럼 말입니다. 롬8:26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조언과 인도를 받는 사람은 갈라디아 5:22,23의 말씀처럼 성령의 영적 열매를 풍성히 맺습니다.
본론: 그렇다면 이감사의 달에 오늘 본문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성도는 어떤 사람인지 상고해 보겠습니다.
먼저,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성도는 잘 멈출 수 있는 사람이다. 고전9:25에 보면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예화)프랑스 파리의 은행 공채에 응시한 한 소녀. =하나의 핀을 아끼는 마음으로 우리 은행에서 일을 해줍시오. 우리에겐 물질의 절제 뿐아니라 시간, 정욕,말,돈,욕심의 절제가 필요하다. 인생의 즐거움도 절제하지 못하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두번째, 그리스도의 나무에 붙어 영양을 공급 받을수 있는 훈련을 반복해야 합니다.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우리는 우리가 맺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닌 다른 것들을 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우리는 우리의 죄와 세상적 욕심으로 끊어지고 막혀버린 주의 영양적 루트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 서신에서 만 느낄수 있는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가 있다. 나는 선한 목자, 양의 문, 생명의 떡, 등 “에고 에이미” 즉 자기의 계시 속에 나타난 예수께 느꼈던 특별한 관계를 그는 표현하고 있습니다.우리는 요한처럼 예수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관계 회복을 위해 기도와 말씀을 개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하나님과 진실한 만남속에 은혜를 공급받지 않고 서 신앙을 론하고 여기 저처럼 말씀을 전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위치와 역할을 재 조명해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일 장소를 암호로 표시할 때 물고기모양의 표시를 해 놓았다.그 안에 들어있는 문자가 ‘잌투스’인데, 헬라어 '익투스'는 물고기라는 뜻이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구세주이시다 ”라는 고백의 첫 글짜를 모으면, Ιησους (예수) , Χριστος (그리스도-크리스토스) , εου (데우)-하나님의 , Υιος(휘오스)- 아들, Σωτηρ (소테르)-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하나더 은혜가 되는 것은사도 바울이 in Christ(165회사용) 신학 용어의 해석이 물고기 같은 우리는 물을 떠나서는 살수가 없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세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종처럼 살지 말고 친구처럼 살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 15절에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라고 하였고, 또 야고보2:23에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들의 친구입니다. God Almighty, Lord of glory. You have called me friend- 이스라엘 호브톤이 부른 ‘Friends of God’의 가사입니다.
3. 풍성한 열매란 보이는 세상적 복이 아니라 생수가 되어 우리속에 흘러 넘치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요한7: 37,38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향하여 61회 이상 은혜와 생수의 강가로 나오라는 말이 직 간접적으로 나와 있습니다.예)Irish 마을의 가난한 농부.
우리가 하나님께 그의 아들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영적인 푼성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우리삶을 충성되게 살아야 합니다.
November 10, 2024
본문: : 골로새서 3:12-17
감사하며 사는 사람 (A person who to be thankful)
서론: 이제 감사의 달인 11월의 둘째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 선생이 로마 감옥에서 소아시아에 있는 골로새 교회에 쓴 편지의 일부입니다. 골로새 교회를 설립한 에바브로디도가 로마의 감옥을 방문했을 때 소식을 듣고 쓴 서신이 골로새서입니다. 그 당시 골로새 교회는 요한 계시록의 7교회중 라오디게아 교회와 근접해 있는 교회로 동방의 신비주의, 유대의 율법주의, 그리고 헬라 철학적 사변종교에 휩싸여 여러 신앙적 문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참 신앙과 진리를 사수할 것을 권고하기 위해 이 서신을 기록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주안에서 감사하는 자는 어떠한 마음을 가졌으며, 또 어떤 삶을 사는 성도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영어로 Gratitude, thankfulness, gratefulness로 표현되는 ‘감사함’이란 말은 헬라어의 ‘유카리스티아’ 그리고 라틴어의 gratus에서 유래하였는데, "기쁨, 감사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친절, 선물, 도움, 호의 또는 기타 유형의 관대함을 받는 사람이 느끼는 감사의 느낌이며, 이와 유사한 긍정적인 반응입니다. ‘감사’라는 논제는 역사적으로 여러 세계 종교의 초점이었습니다. 그것은 고대, 중세 및 현대 철학자들의 관심 주제였고, 현대 철학자들이 계속해서 연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심리학 부분의 ‘감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Martin Seligman이 심리학의 새로운 분과인 긍정 심리학을 도입한 1998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긍정적인 특성을 강화하는데 중점을 둔 심리학의 한 유형입니다. 심리학에서 감사에 대한 연구에는 감사의 감정(상태), 사람들이 감사를 느끼는 빈도(특성 감사)의 개인차, 이 두 측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와 감사의 감정에 대한 단기 경험에 대한 이해가 포함됩니다.
옛말에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주었더니 내 보따리 어디다 두었느냐?”고 투덜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영원한 형벌에서 구해져 영원한 삶을 이미 시작됬습니다. 나의 생명을 구해 준 사실보다 더 감사할 것이 세상에 있을까요? 롬3:23,24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큰 은혜를 입은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할까요?
본론: 먼저, 감사하는 사람은 그 마음의 상태가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인내로 가득 채워쟈야 한다는 것이다.(12절) 감사를 의미하는 ‘Gratitude’의미는 받은것에 대한 고마움이 항상 마음과 몸에 배어 있어 attitude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하는 설교 내용 중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감사는 어떤 사람에게 부채를 느끼고 그 대상에만 잘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에게도 자기가 은혜입은 것처럼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고 죽으심이 우리에게서 보상을 받으려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둘째, 감사는 작은 것부터 시작됩니다. 눅16:10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마태25장에도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는 바로 감사함의 표현을 의미합니다. 구약 성경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엘리사 선지자는 나와 보지도 않고 사환을 시켜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을 하라고만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화를 내면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아람 나라에 요단강만한 강물이 없어서 목욕하려고 여기까지 왔겠느냐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때 참모들이 나아만 장군에게 만약에 선지자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았겠느냐고 조언했습니다. 재산 전부를 달라고 해도 주었을 텐데, 목욕하는 것 같은 작은 일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하는 합리적인 제안이었습니다.
셋째, 감사하는 자세는 마음의 평강이 우선이다. (15절)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고 하셨습니다. 감사할 일이 있어야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속에서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처음 신앙을 갖었 때 무엇인가 우리속에 밀려오는 기쁨과감사와 평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나친 과욕을 부리다 보면 마음의 평안이 사라지고 감사드릴 수 없 습니다.
넷째, 감사함의 표현은 바로 찬양입니다. (16절)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그 감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원어 성경을 보니 프살모이스(시), 휨노이스(찬송), 오다이스 프뉴마티카이스(영적인 음률) 로 감사하라 하였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쁠 때만 감사 찬양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욥기와 시편은 고난속에서 지어진 글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욥이 자기의 식솔들과 가산을 다 잃고 고백한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욥1:21에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드리는 찬양을 선택하는 기준이 본문16절과 엡 5:19절에 있습니다. 우리의 시련과 역경속에서도 주께 기도하며 천국의 소리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Amazing Grace’ 찬양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곡의 가사를 지은 ‘존 뉴튼’은 아프리카나 카리브해 섬에서 노예들을 납치해다 파는 배의 선장을 하였는데, 인간을 가축 이하로 취급하는 노예선에서 온갖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께 회개하고 난 후 자기 같은 사람을 구원하신 것에 너무 감사해서 이 찬양시를 썼습니다. 지금의 찬송가 속엔 독일, 웨일즈, 영국 국가가 등이 있어 우리가 자주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원하는 것 내게 배어 있는 다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도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지순례에 가면 갈 곳들이 오늘 본문에 나온 골로새를 비롯한 소아시아 지역에 가면 저는 마음이 정말 슬플것 같습니다. 이곳은 지금 이미 오래전에 이슬람권에 들어가 그 복음의 꽃을 피웠던 곳은 이제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저는 가끔 교회사를 살펴보면서 한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고 복음의 확장된 후 그 지역에서 1세기 이상 번성 하지 못할까 의문점을 제기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님께 구했으나, 아직 주께 받지 못한 것들을 위해서도 감사하십시오. 이 말은 요즘 미국에서 유명할 뿐만 아니라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 배우인 Denzel Washington이 어느 대학 졸업식에서 한 말입니다. “여러분이 간절히 기도했으나, 아직 응답 받지 못했지만 어느날엔가 주실 것이라 확신하고 믿고 감사하십시오, 나의 세대가 아니면 다음 세대에라도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무엇에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께 감사하라” 말씀처럼 내게 감사하는 마음을 달라고 주께 기도하십시오. 인간의 성격과 삶을 바꾸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결론: 우리가 순간 순간 감사를 표현하는 삶을 살기위해서는 내 마음 자체가 감사하는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기쁠 때만 아니라 시련과 역경속에서도 견디며 마음을 가다듬고, 주의 뜻을 헤아리는 세상이 보기엔 이상한 말을 해야 하며, 천국의 소리로 감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감사하는 자’라는 원래의 뜻은 ‘감사를 ‘창조하다,’ ‘이루다’, ‘실천하다.’입니다. 우리는 어떤 순간만 감사하는 part time 기독교인이 아니라, 늘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가 주관하심으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가 흘러나오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체가 ‘감사하는 자’가 되야 합니다.
November 3, 2024
본문: : 요한복음10:1-9
성령의 음성을 듣는 사람
우리가 시편 32:8절을 보면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구별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최상의 선택은 무엇인가? 아마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르는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목자이시고 우리는 양입니다. 그러므로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목자의 음성을 구별할 수 있다고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본문 다음 27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지시기 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 16:13,14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마음에 모시면 모두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음성을 우리의 영이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자신이 본 꿈이나 예언, 아니면 환상만을 가지고 성령님의 음성을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때로는 무모하고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첫째, 성경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주요 통로입니다. 성령은 성경의 저자이므로 성령님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통로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꿈과 예언, 그리고 환상을 통해 개인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신비한 통로들은 성경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통로를 통해 이해되고 분석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환경과 장소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잘 보여 줍니다.
성경은 특별한 계시의 책이며, 유일한 계시의 책입니다. 성경보다 특별하고 성경보다 유일한 책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책이다. 예화 ) 토비아 루스킨, Givot Olam의 CEO.
둘째, 기도는 가장 성령의 음성을 더욱 친근하게 들을 수 있는 통로입니다. 전화를 받을 때, 그 전화를 걸어온 대상자가 배우자나 가까운 친척, 아니면 가까운 친구일 때는 그들의 음성을 금방 알아듣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소리에 친숙하기 때문이다. 만약 1년에 한 번씩 걸려오는 친구의 전화라면, 그 사람의 목소리를 식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은 한 가지이다. 물론 여러 가지 장애물로 인해 때론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우리가 기도를 통해 성령님의 음성에 친숙해 진다면, 우리는 다양한 통로를 통해 한 가지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아주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기도할 때 보고 듣는 신비한 음성만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나의 삶에서 중요한 일을 결정 할 때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 많은 교인들이 당면한 상황 속에서 그 무엇인가 새로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자기 자신만은 하나님께서 개인적이고 예외적인 음성을 들려주시 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성경을 통해 이미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과 의사를 무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아주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경우, 성령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방법을 통해 말씀하신다.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서 말씀하시지만 결국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말씀하시려는 의도는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때로는 복합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해야 한다. 자신이 본 꿈이나 예언, 아니면 환상만을 가지고 성령님의 음성을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때로는 무모하고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주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경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다양한 음성들을 객관적이고 균형적인 감각을 가지고 해석해야 한다.
어느 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신명기 7장을 읽으며 묵상했느데, 성경을 읽고 묵상을 나눌 때, 한 자매가 자신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말했습니다. 그 자매는 현재 예수를 믿지 않는 청년과 교제를 나누고 있었는데, 교제하는 중에 그녀의 마음속에 그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주변의 사람들도 그녀에게 그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권고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신명기의 말씀을 함께 읽는 중에 7: 2에 “불쌍히 여기지 말 것이며,” 와 16절에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가 그녀의 가슴 속에 깊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겠어요. 그것을 행할 믿음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부탁했습 니다.
October 27, 2024
본문: : 요한복음 17:13-21
기독교 신앙의 근본
서론: 이번주 31일은 507번째 맞이하는 종교개혁 일입니다. 지금의 많은 사람들은 이날을 할로윈 날로 더 많이 지키고 있습니다. 심지어 많은 기독교인들도 종교개혁일 보다 할로윈 날을 더 먼저 기억합니다. 종교개혁이 단지 16세기에 와서 교회를 정화했다는 것으로 그 의미를 축소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 당시 교황을 중심으로 한 잘못된 교회 정치와 미신적 요소가 들끓었던 기독교 문화를 정화했다는 정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신앙과 성경의 절대 권위 그리고 교회의 봉사적 사명을 확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의 여러 관습과 신앙의 절차가 인간의 관점에서 이뤄지며 시역자들의 독단적 인도로 교회가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사도요한이 기록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드렸던 마지막 기도를 살펴보면서 이 시대의 우리의 신앙적 근본이 어떻게 다시 세워져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우리가 네오나르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면, 예수님 오른편에 여성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남성이 그려져 있습니다. 요한복음13: 23에 “그때 주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 곧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자가 예수의 품에 기대어 있더라.” 주님의 품에 기대어 있던 사람은 바로 요한이었다. 요한은 자기 자신을 언제나 이런 식으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자라고 지칭했습니다. 그는 요20:2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을 쓴다. “그녀가 달려가서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와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20:3,4,8에서는 자신을 가리켜 “예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라고 지칭했습니다. 저녁 먹는 자리에서 예수의 품에 기대어 앉아 있는 사람을 21:20에서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사람이 요한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21:24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을 증거하고 또 이런 일들을 기록한 제가가 이 사람이라.”고 표현 되어 있다, 요한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이다. 요한이 자기를 이런 식으로 표현했지만 그는 또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라” 고 요13:1에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요한 자신만을 사랑하신 것은 아니라는 언급을 잊지 않고 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다 보면 몇 가지 놀라운 사실들을 찾을 수 있는데, 문장의 상세한 기록과 섬세한 표현력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오늘 우리가 읽은 17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어떻게 이렇게 사실적이며 시적이며 체계적 교리로 표현하고 있는지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독일의 신학자 ‘멜란히톤’은 이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드린 이 기도보다 더 높고, 깨끗하고 , 아름다운 소리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들린적이 없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칼빈 선생은 “이 기도는 예수의 설교에 권위를 주는 인장이다.”라고 했다. ‘마틴 루터’는 “그 울리는 소리는 단순하나 그 깊이와 넓이와 풍성한 것은 이를 측량할 수 없다.” 또 신학자 ‘벵겔’은 “이는 성경 전체 중 말씀은 가장 쉽고 뜻은 깊은 한 장이다. 오늘 본문의 기도를 보통 “대 제사장의 기도”라고 한다. 참되시고 완전하시고,영원하신 대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계셔서 모든 교회를 위해 기도 하셨기 때문이다.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드리신 기도의 내용이 나오는 몇 곳이 있다. 산상보훈 중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주기도문(마6:9), 갈릴리를 떠나실 때의 찬미의 기도(마11:25), 나사로를 불러내실 때의 기도(요11:41),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마26:39이하)등이 있다. 하지만 오늘의 기도처럼 길고 상세하고, 섬세하고 수사학적 기도문은 다시없다. 이기도의 내용은 1-5절 까지는 주님 자신을 위하여, 6-19절은 제사들을 위하여, 20절- 마지막26절까지는 주를 따르는 온 교회를 위한 기도이다. 오늘 본문의 기도를 유심히 살펴보면 ‘아버지’란 단어가 36회나 등장하는 것이고, “하나되게 해주세요”라는 말이 특별히 많이 등장한다.
이 기도의 중심 요지는 일치(unity,헤노테스), 그리고 조화(Harmony, 쉼피호네시스)이다. 먼저 우리 성도는 주안에서하나되야 하는 것이다. 엡4:3-6,1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먼저 ,인간이 선과 악의 열매를 먹은 이후로 그들에겐 분리하려는 시도가 끝 없이 계속됬다. 가인은 아벨과 자신이 하나님관계 속에서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아벨을 질투로 죽인 것이다. 하나님과 자기 관계에 방해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기도 아벨과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망각한 이유는 비로 불리 의식이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하나님과 먼저 불리됬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같고 있는 자기 동생 아벨에 대한 미움과 질투가 싹텄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요한이 자신을 두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든가 “예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라고 지칭한 것은 주님께서 특별한 면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을 사랑하셨음을 의미하고 또 요한 자신은 다른 제자들보다 자기가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음을 나타낸다.
요한의 이러한 감정이나 표현은 유치한 사람들이 주님을 향하여 느끼고 말하는 그런 사랑, 사랑, 사랑 주님을 사랑해요 따위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사도요한의 성격은 다른 누구보다도 냉철하고 견고하며 옳지 않는 일에 대해서 칼날같던 사람이었으며 타협할 줄 모르는 대쪽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사랑이란 말은 그런 유치한 사람들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요한은 지금 주님의 가슴에 기대앉아 있다. 말하자면, 요한은 그 누구보다도 주님과 가까이 앉아 있는 것이다. 하늘의 그룹들도 요한만큼 주님께 그렇게 가까이 있지는 못했다. 요한은 지금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 주님의 심장에서 맥박 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피의 고동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 성도의 신앙의 특성중 ‘조화’라는 너무도 중요하다. 우리는 좀 어려운 단어지만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인 “삼위 일체” 주요 요지는 ‘일치ενότητα’, ‘조화αρμονία’, 그리고 역동성δυναμισμός과 ‘다양성ποικιλία’이다. 우리 성도들은 주께서 모든 성도에게 개개인의 다영한 인격으로 찾아 오시는 것이다. 내가 이해한 한나님의 역사는 다른 사람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음악의 교향악을 ‘심포니’라 하는데, 이는 헬라어 동사 ‘쉼포네오’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는 성도 개개인의 특성적 신앙이 함께 연합하여 더 큰 영적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결론: 사도 요한은 수제자 베드로에 비하면 예수의 공생애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나 그는 그 자신 나름대로 자신이 가장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며 감사했고, 자기자신에게 다가온 주의 은혜를 영감을 받아 기록한 요한 복음과 서신을 통해 주의 제자 중 가장 많은 사람을 주 앞에 나오게 하며 기독교의 확장에 커다란 공헌을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상세하고도 섬세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속에서 우리는 주안에서 우리가 하나되며 서로 조화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October 27, 2024
본문: : 요한복음 17:13-21
기독교 신앙의 근본
서론: 이번주 31일은 507번째 맞이하는 종교개혁 일입니다. 지금의 많은 사람들은 이날을 할로윈 날로 더 많이 지키고 있습니다. 심지어 많은 기독교인들도 종교개혁일 보다 할로윈 날을 더 먼저 기억합니다. 종교개혁이 단지 16세기에 와서 교회를 정화했다는 것으로 그 의미를 축소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 당시 교황을 중심으로 한 잘못된 교회 정치와 미신적 요소가 들끓었던 기독교 문화를 정화했다는 정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신앙과 성경의 절대 권위 그리고 교회의 봉사적 사명을 확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의 여러 관습과 신앙의 절차가 인간의 관점에서 이뤄지며 시역자들의 독단적 인도로 교회가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사도요한이 기록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드렸던 마지막 기도를 살펴보면서 이 시대의 우리의 신앙적 근본이 어떻게 다시 세워져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우리가 네오나르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면, 예수님 오른편에 여성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남성이 그려져 있습니다. 요한복음13: 23에 “그때 주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 곧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자가 예수의 품에 기대어 있더라.” 주님의 품에 기대어 있던 사람은 바로 요한이었다. 요한은 자기 자신을 언제나 이런 식으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자라고 지칭했습니다. 그는 요20:2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을 쓴다. “그녀가 달려가서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와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20:3,4,8에서는 자신을 가리켜 “예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라고 지칭했습니다. 저녁 먹는 자리에서 예수의 품에 기대어 앉아 있는 사람을 21:20에서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사람이 요한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21:24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을 증거하고 또 이런 일들을 기록한 제가가 이 사람이라.”고 표현 되어 있다, 요한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이다. 요한이 자기를 이런 식으로 표현했지만 그는 또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라” 고 요13:1에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요한 자신만을 사랑하신 것은 아니라는 언급을 잊지 않고 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다 보면 몇 가지 놀라운 사실들을 찾을 수 있는데, 문장의 상세한 기록과 섬세한 표현력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오늘 우리가 읽은 17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어떻게 이렇게 사실적이며 시적이며 체계적 교리로 표현하고 있는지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독일의 신학자 ‘멜란히톤’은 이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드린 이 기도보다 더 높고, 깨끗하고 , 아름다운 소리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들린적이 없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칼빈 선생은 “이 기도는 예수의 설교에 권위를 주는 인장이다.”라고 했다. ‘마틴 루터’는 “그 울리는 소리는 단순하나 그 깊이와 넓이와 풍성한 것은 이를 측량할 수 없다.” 또 신학자 ‘벵겔’은 “이는 성경 전체 중 말씀은 가장 쉽고 뜻은 깊은 한 장이다. 오늘 본문의 기도를 보통 “대 제사장의 기도”라고 한다. 참되시고 완전하시고,영원하신 대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계셔서 모든 교회를 위해 기도 하셨기 때문이다.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드리신 기도의 내용이 나오는 몇 곳이 있다. 산상보훈 중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주기도문(마6:9), 갈릴리를 떠나실 때의 찬미의 기도(마11:25), 나사로를 불러내실 때의 기도(요11:41),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마26:39이하)등이 있다. 하지만 오늘의 기도처럼 길고 상세하고, 섬세하고 수사학적 기도문은 다시없다. 이기도의 내용은 1-5절 까지는 주님 자신을 위하여, 6-19절은 제사들을 위하여, 20절- 마지막26절까지는 주를 따르는 온 교회를 위한 기도이다. 오늘 본문의 기도를 유심히 살펴보면 ‘아버지’란 단어가 36회나 등장하는 것이고, “하나되게 해주세요”라는 말이 특별히 많이 등장한다.
이 기도의 중심 요지는 일치(unity,헤노테스), 그리고 조화(Harmony, 쉼피호네시스)이다. 먼저 우리 성도는 주안에서하나되야 하는 것이다. 엡4:3-6,1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먼저 ,인간이 선과 악의 열매를 먹은 이후로 그들에겐 분리하려는 시도가 끝 없이 계속됬다. 가인은 아벨과 자신이 하나님관계 속에서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아벨을 질투로 죽인 것이다. 하나님과 자기 관계에 방해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기도 아벨과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망각한 이유는 비로 불리 의식이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하나님과 먼저 불리됬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같고 있는 자기 동생 아벨에 대한 미움과 질투가 싹텄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요한이 자신을 두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든가 “예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라고 지칭한 것은 주님께서 특별한 면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을 사랑하셨음을 의미하고 또 요한 자신은 다른 제자들보다 자기가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음을 나타낸다.
요한의 이러한 감정이나 표현은 유치한 사람들이 주님을 향하여 느끼고 말하는 그런 사랑, 사랑, 사랑 주님을 사랑해요 따위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사도요한의 성격은 다른 누구보다도 냉철하고 견고하며 옳지 않는 일에 대해서 칼날같던 사람이었으며 타협할 줄 모르는 대쪽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사랑이란 말은 그런 유치한 사람들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요한은 지금 주님의 가슴에 기대앉아 있다. 말하자면, 요한은 그 누구보다도 주님과 가까이 앉아 있는 것이다. 하늘의 그룹들도 요한만큼 주님께 그렇게 가까이 있지는 못했다. 요한은 지금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 주님의 심장에서 맥박 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피의 고동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 성도의 신앙의 특성중 ‘조화’라는 너무도 중요하다. 우리는 좀 어려운 단어지만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인 “삼위 일체” 주요 요지는 ‘일치ενότητα’, ‘조화αρμονία’, 그리고 역동성δυναμισμός과 ‘다양성ποικιλία’이다. 우리 성도들은 주께서 모든 성도에게 개개인의 다영한 인격으로 찾아 오시는 것이다. 내가 이해한 한나님의 역사는 다른 사람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음악의 교향악을 ‘심포니’라 하는데, 이는 헬라어 동사 ‘쉼포네오’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는 성도 개개인의 특성적 신앙이 함께 연합하여 더 큰 영적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결론: 사도 요한은 수제자 베드로에 비하면 예수의 공생애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나 그는 그 자신 나름대로 자신이 가장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며 감사했고, 자기자신에게 다가온 주의 은혜를 영감을 받아 기록한 요한 복음과 서신을 통해 주의 제자 중 가장 많은 사람을 주 앞에 나오게 하며 기독교의 확장에 커다란 공헌을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상세하고도 섬세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속에서 우리는 주안에서 우리가 하나되며 서로 조화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October 20, 2024
본문: 시편 37:1-9
영혼을 맑게 하는 성도
우리가 잘 아는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말하기를 “가장 유쾌한 사람은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정의 로운 자이다. 가장 즐겁지 사람은 항상 자기를 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시편37:5.6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의 마음을 평안과 기쁨으로 채우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마음을 맑고 밝게 하는 것이 성도의 첫째 의무라 할 수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고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은 ‘하나님의 섭리의 거울’이라 하였고, 종교개혁자 루터는 “성도의 거울이 여기있다”고 하였습니다.
본론: 영혼을 맑게 하려면 과연 어떤 영적 훈련을 해야 할까요? 첫째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회개’라는 명사는 11번 등장하는데 ‘회개하다’라는 동사는 50회나 등장합니다’‘믿음’과 ‘사랑’의 단어처럼 성경에서 거의 동사로 쓰였습니다. 히브리어로 ‘슈브’라고 하는데 “시작했던 지점으로 돌아가다.”는 뜻도 있고, 그리고 ‘뉘우치고 기뻐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욥기서42:6에 ‘나흐캄’이라 해서 ‘후회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메타노이오’란 동사로, 매타노이아로 명사로 쓰였습니다. 신약성경에46회 등장합니다. 헬라어 ‘메타’의 의미는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John Loke는“회개는 과거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이며,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 로한 성실한 결심이자 노력이다. 회개는 하나의 슬퍼하는 행동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회개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우리의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법에 성실히 순종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사람들은 잘못을 인정하면 창피하다는 고점관념이 있습니다. “영혼 깊히 참회로 흘러내리는 눈물은 죄인만이 알 수 있는 최초의 기쁨이다.”라고 아일랜드의 시인인 Thomas Moore가 말했습니다. 우리 옛말에 “맞은 자는 발을 뻗고 자고 때린 자는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말이 있습니다. 예화) 나의 어린시절 돈을 훔친 이야기.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쳤던 소리였습니다. 마가1:4에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가정 먼저 외치셨던 천국복음이 마가복음1:15이었습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입니다. 골1:14에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예화)성령이 비둘기같이: 마3:16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고 하였습니다. 비둘기는 날개 밑에서 기름이 나와 몸을 청결케 한다고 합니다.
둘째, 지나치게 자신의 육신의 평안을 위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가장 큰 이단 사상인 영지주의는 육신의 무용론입니다. 육신에는 선한 것이 없고 보이는 물체는 악의 속성을 가졌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도 육신의 몸이 아니라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라는 것이 영지주의 입니다. 헬라어에 육체는 사르크스,육신은 소마. 히브리어는 오직 ‘바싸르’만으로 표현했습니다. 창6:3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물질욕에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물질에 대한 욕구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본능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제어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산상 보훈에서 주의 기도를 가르치신 다음에 6장 25,26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레위기를 외 성경에 넣었는가? 물질적 형식으로 하나님께 제사.
넷째 권력욕과 명예욕을 버리라. 우리 한국사람이 이기기 힘든 것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한국사람의 모든 사람의 이름 끝에는 접미사가 붙습니다. 예) 00부장,00사장, 00교수,00박사 등, 유명한 미식축구 감독이자 해설가이며 신실한 기독교인인 Tony Dungy의 아버지는 흑인 조종사, 박사였으나 그것을 자녀들이 성장한 후에 알았다고 합니다.
요즘 한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화두가 ‘한강’이라는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의 삶의 가장 큰 질문이 “우리가 보는 세상은 그렇게 아름다운데 반면에 세상은 그토록 악한 것일까?”였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맑고 밝은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마18:3절과 4절에서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6절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란 본문 말씀은 너무 유명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지위나 명예로 착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맑고 밝은 마음의 상태와 영적으로운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아름답다는 것은 세상을 맑고 밝고 아름답게 바라본다는 것입니다.”제2차 대전 중 나찌 치하에서 잡혀 고생하는669명의 아이를 구출에서 영국에 입양시킨 니콜라스 윈톤의 이야기: “나머지 250명의 아이들을 구출하지 못해 평생을 죄책감으로 살았다”
October 13, 2024
본문: 잠언 16:1-9
우리의 영적 경영
서론: 우리가 잠언을 읽다 보면 삶의 교훈과 지혜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떠한 확고한 우선적 관계가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크게 3가지 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어떤 마음의 경영 즉 다스림을 행해야 하는지를 가리켜줍니다.
먼저, 우리의 삶에 우리가 계획하고 나가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주관하게 하셔야 이름다운 결과를 얻을 수 습니다. 1,3절에서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계획이 아무리 멋지고 세밀하다 해도, 되고 안 되고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나에게 많은 계획이 있어도 결국은 하나님에 기뻐하심과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의 기쁘심을 얻고 도우심을 얻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드디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런데, 가까운 블레셋 땅이 아닌, 하나님은 그 길을 놔두고 광야로 돌아가도록 이끄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돌아갔더니 멀기만 한 게 아니라 시퍼런 홍해까지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편하고 안전한 길이었습니다. 만일 빠르고 가까운 블레셋 길로 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길로 가면 반드시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그러면 아직 믿음이 연약한 그들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까 염려하여 하나님께서 홍해길로 돌리신 것입니다.
둘째, 우리 삶의 경영에서 하나님의 인간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2절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빵 제조업자가 자신에게 버터를 공급해주는 농부가 무게를 속여 판다고 의심하여 며칠동안 버터의 양을 조심스레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버터가 항상 정량에 모자랐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화가 치민 제조 업자는 그 즉시 농부를 고소했고 되었습니다. 드디어 농부는 판사 앞에서 그 자초지종을 설명했는데, 농부는 저울이 없기 때문에 빵 제조업자가 메일 만들어 내는 빵을 기준으로 버터의 양을 재어 왔다는 것이다. 결국은 빵의 양이 기준에 미달되었기 때문에 부피도 정상보다 줄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버터의 양과 부피도 기준에 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예화와 비슷한 상황의 사건을 경험하며 삽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잘 못을 지적할 때 자신은 전혀 지적 받을 일이 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자기도 피차 일반이면서, 때로는 그보다 더 잘못한 일이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지적합니다.
본문4,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 하실 때 그 피조물에게 그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 중에 의미 없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으니,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이는 것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모든 상황을 사용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거만한 사람을 미워하시니 그들은 틀림없이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을 내버려 두십니다. 다 쓰실 때가 있어서입니다.
구약 왕상 11장에서 건축 책임자 여로보암을 살려 두셨다가 솔로몬이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을 멀리하자 적당한 때에 그를 불러 이스라엘을 남과 북으로 나누셨습니다. 신약에서 빌라도가 예루살렘 총독이 되어 예수님의 심판 자리에 앉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막은 쓸모가 없는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물이 없기 때문에 사막이 된 것입니다. 아무리 비옥한 땅이라도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가뭄이 계속됨으로 물이 끊어지면 금방 사막처럼 변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막이라도 계속 비가 오면 비옥한 땅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의 켈리포니아 지역은 원래는 메마른 사막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곳에 멀리 콜로라도 강줄기를 끌어들여 물을 대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황무지가 지금은 옥토가 되었고 햇볕이 뜨겁기 때문에 농작물이 더 잘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쉽게 구경하는 켈리포니아 건포도, 켈리포니아 오랜지, 켈리포니아 사과 같은 과일들이 바로 그 사막을 옥토로 만든 곳에서 재배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한 것이 아름다운 열매를 얻는 길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사실을 사람은 잘 모릅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수시로 번갈아 다가오니 모두가 우연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쁜 일 역시도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라고 생각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나쁜 것은 사람이고 사람이 제 꾀에, 자신이 파놓은 함정과 올무에 빠진다는 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원치 않는 상황일지라도 용인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October 6, 2024
본문: 호세아 14:2-9
영적인 감성
서론: 지난 주 목요일,3일은 한국의 ‘개천절’, 즉 하늘이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영어로는 ‘National Foundation Day’입니다. 단기 년수로는 4347년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인들을 비롯한 많은 한국 사람들이 5000년전의 신화 속 건국의 날을 우리나라의 정식 공휴일로 지키는 것에 반대하기도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개념으로는 보기엔 우화처럼 우습고 신화같은 단군 탄생 신화를 보겠습니다. 고전문서인 ‘삼국유사’ ‘태백일사’ ‘환국본기’에 보면, 환인의 서자 환웅이 ‘홍익인간’의 뜻을 품고 풍백, 우사, 운사와 제세핵랑군 3천명을 거느리고 삼위 태백산의 신단수 밑에 신시를 세웠다. 그 도시의 이름이 ‘배달’이었다. 이 때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사람되기를 빌어서 환웅이 둘에게 쑥 한심지와 마늘 스무개를 주면서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사람이 될 것이라 하였다. 이를 지켜 21일만에 여자가 된 곰이 환웅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며 이름을 단군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서 창세기인간 타락사를 보면 그렇게 단군 신화가 우리에게 황당한 신화도 아닙니다. 창세기의3장과 이사야 14장 12절 토대로보면 인간이 타락할 때 하늘 천사였던 루시퍼가 타락하여 동물인 뱀속의 들어가 인간과 같은 인격으로 대화하며 하와를 꾀어 타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계12:9에는 큰 용이 곧 옛 뱀이며 마귀이고 사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군신화의 근거에서 출발한 우리 민족이 유대인의 관습과 비슷하여 범사에 종교성이 많은 것도 이런 연유가 아닌가 합니다. 이제 구약 성경속의 유대인의 역사로 가보자. 지난 3일은 유대인의 명절인 ‘Rosh Hashanah’이기도 하였습니다. 레위기서에는 ‘나팔절’이란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Rosh Hashanah’란 말은 ‘그 해의 으뜸’이란 뜻입니다. 레위기23: 24,25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찌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찌니라”고하였습니다. 나팔을 부는 이유는 출29:19에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 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소 선지서의 가장 서두에 있는 호세야서의 마지막 장입니다. B.C 722년경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스라엘이 주의 사랑을 저버리고 타락하고 퇴폐한 길로 들어섰습니다, 결국 그들은 앗수르의 침공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그들에게 호세야를 보내셔서 타락한 길에서 돌이켜 하늘의 백성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주 하나님의 애타는 부르심이 나타나 있고 또한 회개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의 뜻은 ‘구원’입니다. ‘여호수아’ 이사야와 거의 같은 의미이며, 또 신약의 ‘예수’ 같은 의미인데 이는 헬라어식 표현입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 대신 참회의 기도를 드리고 여호와께 모든것을 마끼고 순종을 약속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중. 고등학교 때 I.Q Test라는 것을 했습니다. intelligence quotient라는 말인데, 이것은 지능 지수, 간단히 말해서 사람의 추론 능력의 척도입니다. 그래서 IQ 테스트는 정보와 논리를 사용하여 질문에 답하거나 예측을 할 수 있는 정도를 측정합니다. 또 요즘에 유행하는 능력 지수중 ‘E.Q 지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emotional quotient’이다. 감성 지능(감정 지수 라고도 함)은 자신의 감정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이해, 사용 및 관리하여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효과적으로 의사 소통하고, 다른 사람과 공감하고, 도전을 극복하고 갈등을 완화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에게는 ‘S.Q’라는 지수가 필요합니다. ‘Spiritual Quotient’이 우리 주의 자녀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 능력은 사도 바울처럼 3층천을 가보는 그런 능력이나 심오한 영적 세계를 바라보는 것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예배와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를 체험하고 주님의 뜻을 발견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에겐 어떤 종류의 ‘영적 감성’이 필요한 것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 생각해 보려합니다.
본론: 먼저 주의 말씀을 인지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본문 2절에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 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들은 말씀을 인지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주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훈련들을 게을리하기에 그 말씀을 인지하여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작용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시편19편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9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10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14절은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둘째, 돌이키는 능력지수 높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원죄의 죄책을 유전받았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에게 의지하거나 세상의 제물과 명예와 권세에 의지하여 타락의 길로 빠져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더이상 죄책의 유전과 자발적 타락으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지 않도록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회개의 초청는 간절하고 고귀하며,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 초청은 값없이, 조건없이 부르시는 하나님께서 직접 회개에의 욕구까지 하신다. 본문 3,4절에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찌니라 4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 오는 12일은 유대의 속죄와 회개 절기인 ‘Yom Kipper’ 기간 입니다. ‘욤 키프르’는 레위기23:27에 의하면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하셔서 유대교에서 일년 중 가장 거룩한 날이라 명합니다. 그 중심 주제는 속죄와 회개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이 거룩한 날을 하루 동안의 금식, 고해성사, 집중적인 기도로 지킵니다. 종종 하루의 대부분을 회당에서 보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인지하고 그 은혜 나의 위에 머물게 해야 한다. 5절”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6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7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찌라 저희는 곡식 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우리가 주의 은혜의 임재를 가장 크게 느끼는 곳은 예배 드릴 때 입니다. 우리의 편리주의에 의한 예배가 아니라 가정에서도 열정,겸허, 거룩한 자세로 예배를 드리며 주의 임재를 체험해야 한다. 어떤 분은 찬양을 드릴 때 주의 은혜를 많이 받는 다고 하는 주의 임재를 진실로 느낄 때는 찬양을 들을 때 더욱 느낀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도 순간 순간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를 체험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예배와 삶이 완전 분리되 있는 교인이 많은데 예배와 우리 삶은 항상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결론: 5절 서두에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이슬과 같다”고 하셨다. 옛날 광야에서 샘을 팔때 물줄기를 찾는 방법이 있는데, 새나 닭의 깃털을 밤에 평지에 꽂아 놓고 아침에 이슬이 내릴 때 그 깃털이 건조한 지점이 물줄기가 있는 곳이라 판단한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반대의 특이한 사실이다. 땅이 매마르면 아침에 이슬을 더 많이 받는다고 한다. 우리 성도 들도 이슬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 성도의 심령이 더 갈급해야 한다. 시편 42:1-2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우리가 하늘이 열리며 주의 임재를 느끼기 위해, 오늘도 우리 육신의 욕구와 세상에 대한 욕망을 줄이고, 주의 은혜와 임재를 경험키 위해 우리의 심령이 더 갈급하며 영적 감수성을 더 키우는 성도가 됩시다.
September 29, 2024
본문: 마태복음 4:12-17,23
예수와 천국
본문: 마태복음 4:12-17,23 9-29- 2024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4장 16,17절에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치신 말씀입니다. “회개하라(매타노에오)”는 성경전체를 통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지나간 일을 돌이켜보다. 마음을 바꾸다. 하나님께로 향하다는뜻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뜻합니다.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의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와 동의어로 구약사상에 깊히 뿌리를 하고 있으며, 공간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이룹니다.
우리나라의 구한 말에 주의 복음이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오고 일제시대 전인 1901년 에는 평양에 신학교가 세워졌습니다. 1907년 6월 20일에는 신학교 첫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인서,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 등 7명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그해 9월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써 한국의 첫 장로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세상에 나가 외치던 말이 “예수 천당”이었다고 합니다. 즉, “예수 믿고 천국가세요” 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목사님으로 3년후 신학교를 다닌 최 봉석 목사님이 외치던 말도 “예수 천당, 불신지옥”이었습니다.
오늘 보문 23절에 예수께서 처음 하셨던 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첫째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 즉, Proclaiming이고, 둘째가 가르치시는 것 teaching이고, 셋째가 모든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것Healing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기독교의 기본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많은 program이 있지만, 정말로 우리 교회 안에 예수님이 처음 보여 주셨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천국 복음의 전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책을 집필한 John Bright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가 구약성서 전체에 흐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먼저 천국은 우리 마음속에 임하는 것입니다. 눅17:20,21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가르치는 사역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것이 모아놓고 강의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삶을 나누는 그런 훈련들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 교회 안의 성경공부 모임이 자주 친목 모임 위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셋째, 치유하는 사역입니다. 23절에 예수께서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every kind of sickness)” 라고 하였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자 한국과 미국에서는 교회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기보다 정치적 영향력을 더 중요시합니다. 외형적 환자를 치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적, 정신적 환자를 치유하고 돌보는 일 또한 교회의 중요한 사역입니다. 예화) 암을 치유 받은 비 기독교인. 우리가 치유의 사역을 할 때 유이해야 할것이 있는데, 마태8:3,4에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고 한적이 있습니다. 이 사역은 치유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과 하나님 나라의 임함이 더 우선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사탄의 세력도 치유를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님은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나중까지 예수 그리스에 대해서만 설교하였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않았다. 당신이 복음을 전하려면 그 모범을 따르라. 그리고는 시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을 되풀이하여 당신의 이야기로 삼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뒷 모습
얼마 전, 한국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내한공연을 펼쳐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로열 콘Royal Concertgebouw Orchestra의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의 음악을 감상했던 어떤 음악평론가는 ‘약간 등이 굽어보이는 그의 뒷모습은 그만의 예술적 고뇌와 삶에 대한 겸허함과 소리에 대한 집중력을 고스란히 담아내 감동을 주었는데 그래서 그의 뒷모습은 진정한 최고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웅변해 줬다’는 글을 썼습니다. 123년 전통의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명성에 걸맞게 빌렘 케스, 빌렘 멩겔베르크,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등 세계적 지휘자의 뒤를 이은 마리스 얀손스에 대한 음악 평론이었습니다.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는 일단 연주에 임하면 청중을 향해 항상 뒷모습을 보입니다. Concert Hall의 합창석이나 연주석에 앉는 몇 사람은 지휘자의 앞모습을 보지만 대부분의 청중은 항상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앞모습이나 얼굴보다는 뒷모습을 본다. 이렇게 홀의 청중은 지휘자의 얼굴 표정이나 손과 발놀림의 제스처를 볼 수 없어 무미건조해 보이지만 지휘자 뒷모습에서 많은 감동을 받고 환호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40일 금식기도를 세 번했습니다. 첫 번 째는 십계명 돌 판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서 했던 금식 기도였고(신 9: 9), 두 번 째는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아론과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 하실 때 중보기도로 했던 40일 금식 기도였으며(신 9: 18, 25) 세번 째는 두 번째 십계명 돌 판을 받을 때 했던 금식 기도였습니다(신 10: 10) 오늘 본문은 두 번째 40일 금식기도 때에 경험한 신비체험으로 하나님께서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과의 가나안 동행을 거절하고 대신 천사를 보내 길을 안내하겠다는 말씀을 듣고 모세가 40일을 금식하며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이스라엘과 동행해주실 것을 기도할 때’ 체험한 신비한 경험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이신 뒷 모습을 보면 정말 섬세한 하나님의 긍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40일 금식기도 중에 모세는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달라”(I pray you, show me Your glory!) “제가 간구하오니 당신의 얼굴이나 용모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33: 19-23에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그러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You shall see My back parts, but My face shall not be seen;)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는 4000여명의 성경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영광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뒷 모습’을 보는 신비체험의 사람이 됩니다. 본문 전9,11절에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 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친근함과 인자하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신앙인으로 우리의 뒷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되니다. 일본의 서예가이자 시인인 아이다 미쓰오(1924-91)가 그의 노스승 다케이 데쓰오 에게 들어서 평생 동안 마음에 새기고 새겼던 말 중에 하나는 “면벽좌선하고 있는 사람이나 경건하게 기도하고 있는 사람의 등을 보면, 그 사람이 지닌 역량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뒷모습이 충실한 사람이야말로 제대로 된 사람이다. 무대 배우든 누구든 명배우라 불리는 사람들은 모두 뒷모습이 충실했다. 뒷모습이란 자신은 의식할 수 없기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얼굴로나 말로는 속일 수 있어도 뒷모습은 속일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다 미쓰오는 그 말을 좌우명처럼 생각하고 평생을 자신의 뒷모습에 충실하려고 애썼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안 보이는 것 같고 감추어진 것 같지만 사람의 뒷모습은 너무나 많은 진실을 담고 있고 많은 진실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뒷모습이야말로 진짜 그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생 피사체의 뒷모습만 찍은 사진계의 거장인 프랑스의 에두아르 부바의 친구 미셀 투르니에는 부바가 찍은 쉰 석 장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집에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로 표정을 짓고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모든 것이 다 정면에 나타나 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의 이면과 뒤쪽 등 뒤쪽이 그 사람의 진실이다. 진실은 항상 뒤쪽에 있다”는 설명글을 달았습니다. 그렇다. 우리의 뒷모습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예쁘게 아름답게 보이려고 치장하고 덧칠하며, 자기를 과시하고 멋있게 보이려고 꾸미고 변장하는 앞모습과 달리 사람의 뒷모습은 모두 정직하고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짜 멋진 배우는 뒷모습이 충실합니다. 최고의 지휘자는 뒷모습이 감동이다. 그리고 정말로 멋있는 목사와 성도는 뒷모습이 당당하고 존경스럽다. 오늘 나와 당신의 뒷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저는 뒷 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을 존경합니다. 떠나는 모습이 아름답고, 그 사람의 숨겨진 일상, 즉 보이지 않는 뒷 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을 좋아 한다는 말씀입니다. 잠시 환담을 나누다가 헤어졌는데, 헤어진 후 더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동체에 머물다가 사정이 있어 다른 곳으로 떠난 사람이 그리워짐은, 그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성형이 유행하는 세상, 인간의 인격이 상실해 가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세상에 태어나 한 평생 살다가 하나님 품으로 떠나신 분들도, 그 떠나간 자리가 아쉽고 그리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의 삶에서 뒷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먼저 떠난 친구들 가운데에도 유난히 뒷 모습이 아름다웠던 친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 그립고 안타깝습니다. 우리나라를 이끌었던 역사 인물 가운데에도 뒤가 아름다운 분들이 계십니다.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김구 선생님, 안중근 의사가 있습니다.
오늘 신약 빌립보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15,16절에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먼 훗날 우리의 뒷모습 우리의 걸어온 자취를 보며 우리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September 15, 2024
본문: 마태복음 9:35-38, 요한복음4:35-38
영적 추수의 일꾼
서론: 모래는 우리 한국의 2대 명절중의 하나인 추석입니다. 이곳의 있는 우리 2세들은 이날을 중요시하지 않지만 우리 세대등은 아직도 마음속에 깊이 자리자고 있는 고유의 명절입니다. 저희 집은 특별한 연유가 있어 미국에 온 이후에도 이 날에 가능하면 다른 날보다 귀한 음식을 차려 식구들과 나누는 전례가 있습니다. 이날은 2년전에 소천하신 저희 아버님의 생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국의 추석이란 우리 조상들이 미국의 추수 감사절처럼 처음 추수한 곡식들에 대한 감사의 제를 시행하는 날입니다. 한해 처음으로 추수한 곡식과 열매들을 가지고 음식들을 차려 조상에 대한 감사와 재해에서 지켜 주시고 귀한 환경을 허락하신 하늘의 신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2천년전 이맘때에 들녘과 세상을 바라보시며 한탄하시며 하셨던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본문37,38에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영적 ‘추수할 일꾼’ 어떤 사람이며 이 세대 가운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나누어 보겠습니다.
본문 35절에는 예수께서 공생애 가운데 하셨던 3가지 중심사역이 등장합니다. 첫째가 ‘디다케’ teaching 즉 가르치는 것입니다. 둘째가 ‘케루소’ preaching 즉, 전파하는 것이며, 셋째가 ‘떼라퓨온’ healing 즉 치유하는 사역입니다. 참고로 오늘날 교회가 하는 일 네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말씀 선포 (케리구마), 둘째가 가르침(디다케), 셋째가 교제(코이노니아), 넷째가 예배(프로스큐네오)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이 네가지의 기능을 다하고 있는지 우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뜯듯 미지근하고 교회의 본래 모습이 상실되어 가는 것은 추수꾼의 원래의 본분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오즉하면 이단인 ‘신천지’가 자기들을 추숫꾼이라 하여 기성교회에 침투시키겠어요? 이 시대는 진정한 하나님의 추수할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주의 추수할 일꾼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첫째, 하늘을 의지하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들녘의 추수가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도움없이 진정한 추수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슬로베니아의 한 선교사 부부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닥친 문제보다 주의 더 큰 은혜를 우리에게 주셔 그것을 이기게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둘째, 수고한 열매를 기대해야 한다. 자기의 피땀 흘린 열매를 기대해야 한다. 본문 요한복음 4: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사실 이 말씀처럼 오늘날의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한 성도들의 노력으로 많은 열매를 얻는 교회나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타성에 젖어서는 않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땀 흘리지 아니한 것을 얻으려는 사행심리가 있습니다.
셋째, 예리한 눈을 들어 들녁을 바라보는 눈을 가저야 합니다. 옛날 제가 시골에서 성장할 때 보면, 부지런한 농부는 일직 일어나 들녁을 자세히 살펴보고 색채를 보며 그 상태를 진단합니다. 그것이 심상치 않으면 가까이 가서 수분의 상태를 보거나 병충해의 위협이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봅니다. 영적 추숫군은 시대를 직시하는 예리한 눈을 가지고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사람이 되어여 합니다.
넷째,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 4:35보면, 팔레스틴 지역에는 곡식이 익어 추수할 때까지 넉달이 걸린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고통과 지루함을 참는 사람이 참된 추숫군입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와 침한 더위를 견디며 그것들을 돌보는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다섯째, 말보다 행동이 필요한 것이다. 추수를 기다리는 사람은 사람과의 대화보다 농작물과의 대화를 하며 묵묵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옛말에 “먼저 행동을 하고 말을 꺼내라.” 격언이 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3차원의 생각을 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윤을 얻기보다 먼저 사람을 얻기 위해 애쓰라는 뜻입니다.
결론: 추수를 기다리는 사람은 늘 자기의 곡식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꿈을 꾸듯, 영적 추숫군은 주위 사람에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혀가 생물학상 보통 길게 네밀면 15cm, 무게는 100그램 정도 됩니다. 이 혀를 훈련시키는 데는 2년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보통사람은 분당150마디의 말을하고, 빠른 사람은 180여마디를 한다. 그것으로 우리는 좋은 말, 나쁜말, 거짓과 참을 발설합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지루한 얘기는 1인칭, 남 험담은 3인칭, 훈륭한 대화는 3인칭이라 합니다. 말에는 문(door)이 3가지가 있는데 진실의 문, 긍정의 문, 유익의 문이 있답니다.
추숫군을 원어로하면 ‘다리스테스’라고 합니다. ‘다르세이’라는 동사에서 왔는데, 이 뜻은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안심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Fredrick Will. Robertson이라는 사람은 “진리는 그 사람의 인격에 있다. 예수는 진리를 간단하게 말하지 않았다. 진리는 하나의 단어가 아니다. 삶과 그 존재속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September 8, 2024
로마서 3:20-28
하나님과 관계의 회복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의 복음의 중심 메시지 인 ‘신앙의인’을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서 서두의 1:16,17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바울 자세하게 그의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도덕과 윤리적 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 속에 자리잡고 있는 원 죄인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 인간의 근원적 죄악은 오늘날 흔히 강조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오는 죄, 즉 부도덕이나 비윤리적인 죄악이 아닙니다. 오늘 날 사회 문제를 파악하는 제 학문이나 철학의 관점은 인간과 인간관계입니다. 인간의 비 인간성이나 잘못된 인간관계모든 죄악을 초래하고 문제를 야기시킨다고 대부분의 철학자나 사회문제 연구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 인간의 근원적 죄악은 인간사이의 잘못된 유대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잘못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구약성경에 의하면 최초의 인간이 관계를 맺은 것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죄의 개념도 하나님과의 언약의 파기에서 나왔으며, 이러한 죄로 인해 죽음이 왔고 인간사이의 범죄가 생겨났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아들때에는 살인으로 발전되었습니다. 결국 오늘날 죽음을 비롯한 인간사이의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단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존 칼빈 선생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 오기전의 인간은 물질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이용하게 된다.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오기 전에 사람들은 세상을 정복하나 자기 자신은 정복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미음에 들어오면 세상은 정복하지 못해도 자기 자신은 정복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천국을 얻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두번째, 하나님과 관계 단절 극복의 기능으로서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은 일방적인 파기에서 왔지만 그것을 회복할 능력은 인간에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죄로 인해 고난의 삶을 살다가 죽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래 창조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평안하고 영원히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본래의 창조의도를 살리는 방편의 법이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를 수 있는 지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최초의 선물이었습니다. 에녹과 노아는 이 선물을 받고 지킴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 소수의 사람입니다. 선택적으로 시작된 이 은혜는 모세 때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심으로 보편적 구원사역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태5:17,28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신 것이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세번째, 죄인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 선생으로서 율법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을 생명으로 이끄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완전하여 인간이 다 지킬수 없는 상황에 빠졌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깨닫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상태를 발견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 즉 범죄한 것을 명백히 드러내기 위해서 덧붙여진 것입니다. 율법이 완전하여 인간이 다 지킬수 없는 딜레마에 빠졌을 때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다시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통로를 통해 인간과 대화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구원만 믿고 하나님과 말씀과 기도를 통해 대화하지 않는다면 큰 모순입니다. * 부란스필드 신부의 예화 ‘악마들의 총회’
September 1, 2024
베드로전서 1:15-25
가장 거룩한 삶
오늘은 9월의 첫날입니다. 어떤 사람이 컵으로 음료수를 마시다가 컵을 쳐다보며 말합니다. “벌써 다 마시고 조금 밖에 남지 않았구나.” 이것을 보며 옆에 앉은 사람이 하는 말이 “아직도 3/1이나 남았어요” 두번째의 사람이 하는 말속에는 두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희망이라는 의미가 있고, 다른 의미는 긍정적인 의미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9월의 첫날이지만 어떤 사람은 “아니 벌써 1년이 2/3가 지나갔네.” 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며, 어떤 사람은 “금년이 아직도 1/3이나 남았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이런 긍정적 태도와 늘 희망을 갖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주께서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세상에서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수 있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1절). 요즘 여러 연예인, 체육인들이 기독교 방송에 나와서 간증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속에는 예수를 믿는 다는 말이 없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만 있습니다. 비슷한 말처럼 생각되지만 신앙의 기초적 의미로 보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과 하나님과 관계를 이어주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은 늘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주님이 주신 믿음과 소망으로 살아야 합니다. 21절에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믿음과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화) 아침에 운동하며 만나는 두 젊은이.
셋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첫째의 길은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22절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넷째, 영원한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안에 있는 진리를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4절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고 하십니다.
요즘 시대는 우리가 자라던 시대와 비교하여 그 가치관이 많이 다릅니다. 도덕적 가치관과 사회적 기준도 심지어 종교적 접근 방식도 그렀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고 다고해서 하나님과 인간관의 관계속에서의 위치, 그리고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게 우리에게 부탁하시말씀은 형제 사랑의 계명은 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오늘 들고 나온 기타가 있습니다. 이것은 3개월 전에 70세를 일기로 소천하신 한 집사님이 저에게 선물하신 것입니다.
August 25, 2024
잠언 30:1- 9,
마태복음 7:24-27
하늘의 지혜를 가진 사람
우리가 잠언의 내용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우리가 주 안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선 잠언을 메일 한 장씩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전체가 31장이니 한달이면 전체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신약의 예수께서도 산상수훈의 결론을 내리시며 지혜로운 사람을 말씀하셨습니다(마태7:24-27). 오늘 본문 서두에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성경에서 ‘야게’ 그리고 ‘아굴’이란 이란 말이 다른 곳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원문에 나오는 이름의 뜻을 살펴보면, ‘야게’의 뜻은 ‘순종’ ‘겸손’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굴’이라는 말은 ‘수집하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학자는 ‘아굴’이 솔로몬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성경을 최초로 라틴어로 번역한 제롬은 본문을 ‘수집하는 자의 아들’, ‘발표하는 자의 말’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또다른 학자들은 ‘잠언’이라 번역된 히브리어가 ‘하맛사’여서 본문의 저자가 이스마엘 후손들이 많이 살던 ‘맛사’ 출신이 아닌가 추측한다. 열왕기상4: 29-31이하를 보면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31저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32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 다섯이며” 라고 되어 있는데, 지혜로운 동방 사람들 중 한 명이 아닌가 추측한다. 그리고 저자의 아들이 ‘이디엘’과 ‘우갈’인데, ‘이디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라는 의미이며, ‘우갈’은 ‘강함’이라는 의미이다. 이 모든 자료를 통해 보면, 이 말씀의 저자인 아굴은 솔로몬과 같은 현자, 시인이며, 이디엘과 유갈은 그의 제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누가 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동을 받아 쓴글이 무엇을 의미하고 우리에게 그르치고 있느냐 인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겸손하고 진실한 신앙인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안에서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 지혜로운 사람의 삶은 어떠헤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져,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2,3절에 보니 인간의 무지함을 시인하는 것이 큰 지혜를 얻는 길입니다. 무디 선생님이 15분 설교하는데 16번의 문법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어느 교수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무식하지만 다른이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최선을 다하는데, 당신은 그 많은 학식을 가지고 인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해 높임을 받습니다. 성경 요나 서에 보면 니느웨의 왕과 백성들이 자기 속국에서 온 요나의 외침을 듣고 겸손하게 회개하였습니다, 눅18:13에서 예수님은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빌3장에서 바울은 자기의 세상적 학식과 지위를 배설물로 여길 정도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눅15장의 ‘탕자의 비유’도 사실은 자기를 낮는 자의 복을 말합니다.
둘째, 자연계시를 통해, 특별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 자신을 낮추게 되면 하나님을 느낄 수 있고 주님으로부터 참 지혜를 얻는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능력과 오묘한 역사를 다 알 수 없습니다(.4절) 하나님의 가장 큰 신비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 한 신비입니다.
셋째, 진실한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5,6절) 깨끗한 마음을 주시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을 열망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허탄한 생각은 내적인 공허함과 낙심을 가져오게 됩니다.
끝으로, 물질에 대한 올바른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8절)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요즘 목회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성도를 울게 하는 것은 물론 웃게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1923년 미국의 9대 재벌이 시카고의 있는 워터 비치 호텔의Chicago's Edge에서모임을 열었습니다. 그 당시 이들의 부를 합치면 미국의 국고보다 많았습니다, 그런데 25년 후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최대 철강회사 사장(베들레헴스틸)인 Charles M Schwab은 그가 파산하기 전에5년 동안 차입 자본으로 살다가 나중에 무일푼으로 죽었습니다. 2. 당시 가장 큰 가스 회사인 하워드 허브슨(Howard Hubson)의 사장은 정신병을 앓다가 죽었다.3. 최고의 market 거래자 중 한 명(밀 투기꾼), Arthur Cutten, 지급 불능으로 사망했습니다.4. 당시 뉴욕증권거래소 회장 리처드 휘트니, 감옥에 보내졌다.5. 미국 대통령 각료(대통령Harding의 내각), Albert Fall은 집에 가서 편히 죽으라고 감옥에서 사면되었습니다.6.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큰손 인 제시 리버모어(Jesse Livermore)와7. 당시 세계 최대의 독점 기업의 회장Ivar Krueger과 8. 국제결제은행의 총재 Leon Fraser는 모두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9. 최대 전력회사 사장 사무엘 인설(Samuel Insull) 무일푼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차츰 매말라가고 있습니다. 요즘 북한의 홍수등 큰 재해가 있어 북한 주민들이 고통받고 있어 불쌍한 마음이 듭니다. 저는 북한에 있는 소수의 기독교인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온갖 박해와 고난을 감수하며 극한 상황에서 견디고 있습니다. 오늘 남쪽에서 평안하고 부유한 삶을 살면서도 감사를 모르고 남을 질시하고 거만해 있는 성도들과 북쪽의 북쪽의 불쌍한 성도들을 하나님이 보신다면 어떻게 생각 하실 까요? 눅16:19-22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August 18, 2024
마태복음 19:16-22
영생에 이르는 사람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하는 말을 유심히 살펴보면 모순이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젊은이는 자기가 마치 모든 십계명을 다 지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청년은 자기 중심의 삶을 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형식적으로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다고 봅니다. 요즘시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와 유사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 한 한국의 미녀가 이 젊은 부자 청년의 문제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2022년 Miss Earth 세계 미인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1등한 여성이 있습니다. 최 미나수라는 여성인데 그가 마지막 결선 인터뷰 질문에서 중요한 대답을 해서 큰 점수를 받았습니다. 사회자가 최 미나수에게 한 질문은 “당신이 이세상에서 하나 바꾸고 싶은 것이 무엇이며,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바꾸겠습니까?”란 영어 질문에 그녀는 “제가 이세상의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공감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감과 친절함을 혼동합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큰 이슈인 기후변화와 다른 문제들도 공감능력이 있어야 풀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들의 고통을 이해해야 합니다. 저에게 어떤 변화를 정의 내릴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가 가진 언어로는 그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라고 당차게 대답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자기만의 생각에서 계명을 지켰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계명을 다 지키고 있는지는 먼저 하나님께 물어야 하고 그리고 이웃에게 물어야 합니다.
요즘 젊은 세대를 MZ세대라 합니다. 밀레니움과 Z 세대를 합성한 말입니다. 지금1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젊은이를 지칭하여 하는 말입니다. 참고로X세대는 1965-1980년에 태어난 세대, 밀레니움 세대는 2000년 전.후에 유.소년기를 거친 세대를 가리키며, Z세대는 1997에서 2013년에 태어난 세대를 가리키는데, 2013년이 스마트 폰이 나와 공용화 된 시점이라 합니다.
오늘 본문과 유사한 말씀이 마태 22:34-40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 표현하셔서 주신 말씀입니다. 37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와39절의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라 하였습니다. ‘둘째는 이와 같으니’ 한 말씀은 37절과 39구절이 똑 같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인데, 하나님 사랑은 구약의 신명기 6: 5절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한 말씀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는 유대인들의 매일 신앙 고백문 Shema(들으라)의 한 귀절입니다.
‘여기서 마음을 다하고 (Mind)’란 유대인들이 이해의 근본으로 여심기는 마음을 다해 애정과 의지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니다. 요시야 왕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사람이다.(왕하 23:25)
또, “목숨을 다하고(Soul)”는 육신의 생명, 즉 살아 있는 동안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사도 바울은 먹는 것도, 먹지 않는 것도, 사나 죽으나 모두가 주를 위해서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뜻을 다하여(Strength)”는 신 6: 5에는 뜻 대신 힘이고 마가와 누가복음서는 ‘힘’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위의 세 가지는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으로 이는 계명 중 가장 큰 계명일 뿐 아니라 인간의 가장 큰 의무이기도 하다.
요즘 한국에서 명상을 말할 때 세가지의 순서가 있는데 첫째가 조신(몸을 조절)이고 둘째가 조식(호흡을 조절), 그리고 셋째가 조심입니다. 이것은 예수심이 말씀하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와 유사함을 보여줍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나자신을 잘 돌아보고 헌신하는 데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이웃 사랑(39)은 레19: 18에서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으며 십계명의 둘째 부분의 요약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네 이웃은 단순히 친구나 옆집 사람만은 아니고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이웃이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형제를 사랑하게 되어 있다.(요일 4:21)
그리고 ‘네 몸같이’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이웃 사랑의 표준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육적이며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희생이 강조된 고상한 사랑에서 비롯된다.(요 13:34) 여기에 사랑의 순수성이 있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서 출발해야 하고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에서 결실되어야 한다.
끝으로 가장 큰 계명이 되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롬 13:10) 선지자의 강령이라 했는데(40) 성경의 기본 정신은 두 사랑에 교훈의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영생에 이르는 길이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을 지키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유대인의 중요한 종교전승이 하나 빠져 있는데 그것은 제사장적 전승입니다. 우리 성도는 제사 드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주신 말씀을 우리 삶에서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실천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좀더 내 이웃을 이해하고 그들과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웃과 공감하는 것입니다,
August 11, 2024
예배소서 4:17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The Essence of Christian life)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어떤 삶의 모습으로 세상의 비추는 가?” 또 “우리는 세상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하고 우리 스스로 질문을 던집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 들은 “내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모셨고, 지금 그리스도 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만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16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세상의 비춰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 중에 아름다운 말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결’이란 말이다. ‘결’의 사전적 뜻은 잠결, 얼떨결과 같이 시간을 나타내는 의미도 있지만 그 가운데 무늬를 뜻하는 ‘결’이라는 말을 나는 좋아합니다. ‘결’이라는 단어는 여러 다른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결’은 무늬이고 리듬이고 잠시도 머물지 않는 시간입니다. ‘결’의 끝소리가 흐름소리인 ‘ㄹ’로 되어 있어 살아 있는 소리인 것입니다.
‘결이’ 하나로 흐트러지지 않는 것을 우리는 ‘한결 같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한쪽으로 가지런히 정돈된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처음처럼 끝까지 변하지 않는 것을 두고 ‘한결같은 마음이다’라고 한다. 굳이 어려운 한자어로는 초지일관이요, 일편단심이라 고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결같은 마음이 아름다운 것처럼 세월을 새긴 ‘나뭇결’ 이 아름답고, 가지런한 ‘머릿결’이 아름다우며 눈이 부시는 것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결은 어떠해야 할까요? 사실 오늘 본문이 있는 에베소서 4장 전체가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의 결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지향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의미 없는 말과 생산성 없는 행동을 삼가라고 하였습니다. (17절) 좀더 영적인 대화와 영적 성장을 위해 애써야 합니다. 유한한 세상에서 금방 사라져갈 것을 위해 사는 것보다 영원한 것을 위해 오늘을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자신에게는 양보없이 철저하고 다른 이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삶을 우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다른 사람한테는 양보없이 철저한 사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셋째, 과거로 회기하는 것보다 새로운 은혜와 능력을 사모해야 합니다. 시간과 공관 속에 사는 우리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삶을 살기 쉽습니다. 사실 철학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과거와 미래 밖에 없습니다. 지금 내가 사는 현재는 0.001초만 지나도 과거입니다. 내가 현재라고 느낄 때 이미 그 시간은 과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전인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내가 무엇을 가졌느냐가 중요한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영적 삶의 결을 유지하며 살았는가 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극동 3국의 메달 획득 분포와 서방 6개국의 메달 분포를 살펴보십시오. 그동 3개국의 금메달이 은이나 동메달에 비해 많습니다. 모든 운동 선수가 금메달을 목표로 운동하지만 오직 금메달 만을 위해 달려간다는 것은 우리 삶의 과정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영적 삶은 목표만 생각하며 사는 것보다 과정이 더중요한 것입니다.
August 4, 2024
본문: 마태복음20:8-16
하늘 나라의 주인과 일꾼
이제 벌써 8월의 첫 주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러 설교자들에 따라 그 해석과 적용이 조금씩 다른 본문 말씀입니다. 사실 본문 말씀은 세상적으로 따지면 조금 불공평한 비유입니다. 세상에서 근로의 원칙은 많이 일하는 사람은 많이 노임을 받고 적게 일하는 사람은 적게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포도원 주인이 아침에 일찍 와서 일한 일꾼과 오후에 늦게 와서 한시간 밖에 일을 하지 않은 일꾼에게 같은 품삯을 준 이야기 입니다. 본문 묵상하다 보면, 우리에게 주는 새로운 교훈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포도원 일꾼의 비유는 주인이 일꾼의 개인의 상황을 고려해주는 긍휼하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인은 자기의 입장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일꾼의 상황을 생각해 주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찍 나와서 일하는 사람이 가정에서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만큼 늦게 나와서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의 가정에서도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것을 주인은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의 주인은 그 만큼 일꾼의 입장에 서서 그의 상황을 아시고 그들을 배려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또한 긍휼에 풍성하셔서 우리를 이해하고 우리를 배려해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하늘나라에서는 섬김을 받는 자보다 섬기는 자가 큰 자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주인이 일꾼들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일꾼들의 입장을 배려해주는 것입니다. 심지어 나중에 온 사람은 겨우 한시간 일하고 하루 품삯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비유지만 지금부터 2천 여년 전 주인과 종의 차이는 엄청난 것인데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하시는 것은 이세상과 천국은 정반대의 상황이라는 것을 부여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3,4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셋째, 나의 진정한 평안과 만족은 외부나 다른 사람에 의해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과 내 안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문에서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은 나중에 오후 늦게 온 사람들이 자기들과 같은 품삯을 받는 것을 보고 주인에게 원망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나에게서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자기 안에 진정한 천국을 이루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또한 인간이 만든 것들을 바라보며 평안을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 천국이 있는 사람은 주위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헬라의 전설 가운데 한 이야기입니다. 고대의 올림픽에서 경기에서 일등을 차지하여 월계관을 차지한 선수를 위해 기념비를 하나 세웠습니다. 그러자 이를 시기한 라이벌 선수가 밤마다 가서 그 기념비를 정을 가지고 밑에서부터 조금씩 깍아 내리다가 그 기념비가 그의 위로 쓰러져 결국 죽고 말았다. 시기, 질투, 미움은 등은 자신을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넷째, 나중에 와서 일찍 온 사람과 같은 품삯을 받은 사람은 그 만큼 주인의 은혜를 더 받은 것이다.우리가 잘아는 16절을 보면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 만큼 주님의 은혜를 더 받은 것이지 일꾼 자신은 그렇게 자랑스럽게 내세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농장주인이 일꾼을 대려 갈 때는 제일 건장한 사람을 대려 갑니다. 나중까지 남은 사람은 일을 잘못할 것 같은 사람인데, 주인은 그들을 대려 갑니다.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주인은 긍휼을 배풀었습니다. 우리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부른 사람은 나 많은 긍휼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끝으로 그리스의 신화에서 ‘마이더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이더스는 ‘바커스’라는 신에게서 선물을 한 능력을 받았는데, 그가 만지는 것마다 금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는 신기함에 기뻐 집에 와서 저녁을 먹으려고 하는데 그가 만지는 빵과 포도주등이 다 금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는 굶어 죽을 것이 두려워 바커스에게 가서 준 선물을 다시 가져가달라고 하였습니다. 그후로 그는 다시는 재산과 호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금은 보석이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천국은 그와 정반대라고 우리 주님은 보여 주셨습니다. 허물이 많고 보잘 것 없는 우리를 불러 주셔서 자녀 삼으시고 천국에서 귀한자로 여겨 주실 것입니다.
July 28, 2024
본문: 요한복음 18:33-38
예수님이 쓰신 왕관
요즘 한국에서 꽤 유명한 스님이 강연을 하면서 하는 말이 불교에서 부처는 자기를 믿으라고 한 적이 없는데, 기독교에서 예수는 “나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언뜻 들으면 꽤 멋있는 말 같지만 종교의 리더로는 신도나 구도자를 꽤 불안하게 하는 말입니다. 한 종교를 설립한 교주가 자기를 믿으라고 표현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를 따르는 제자를 참으로 불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주와 신도 간의 서로 신뢰감이 없이 막연히 나을 사상을 따라오라고 교주가 이야기 했다면 그것은 참 무책임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담대하게 외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한14:6)고 하셨고 친히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드리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로 사순절에 사용하는 부분이지만 저는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이 오늘 본문의 나오는 유대 지도자들과 빌라도처럼 모든 종교적, 정치적개념을 가지고 신앙과 진리를 결부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를 돌아보고 신앙의 진리적 본질을 찾도록 하기위해서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정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묵상할 때는 그것을 단지 사상적 개념으로 만 이해하고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깊이 적용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시대의 사회 계몽가이며 음악인이며 공연 예술가였던 김민기 씨가 지난 주 23일 타계하였습니다. 이제 고인이 된 그가 작곡한 ‘금관의 예수’란 복음송이 하나 있습니다. 이 찬양을 한 기독교인이 듣고 한 말입니다. “70년대, 80년대, 90년대를 지나고 나서는... 그 이후는 내 안에서도 밖에서도 금관의 예수는 들리지 않았었다... 그리곤 금관의 예수를 간절히 바라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오 주님... 아침이슬도 부를 필요 없고, 상록수도 감동으로 느낄 필요 없는 '어디 그런 불쌍한 사람들이 있어?'라는 생각이 지배할 정도로 잘 살게 된 이 나라에... 왜 이토록 금관의 예수, 당신이 이토록 더 절실해지는 겁니까? 우리는 이제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무엇인지도 누구인지도 모를 만큼 무감각 해져서 어제 누렸던 물질의 달콤함이 내일도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더 이상 깨어서 저항하고 꾸짖기를 멈추었고 그늘진 곳의 아픈 자에게 마음으로라도 보듬는 긍휼한 마음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나라의 왕이며 우리가 속한 나라는 어느 나라인지를 생각하며, 우리는 그 나라의 시민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양을 위해 친히 목숨을 바친 목자 같은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괴수 들에게 친히 붙들리고 결박 당하셨습니다. 군림하는 이세상 왕이나 지도자가 아니라 연약한 자 소외된 자를 위해 자신 목숨까지 주신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그 양들을 기르시고 먹이시고 인도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목자가 다가 아닌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하신다.
둘째, 예수님과 믿는 우리가 속한 나라는 이 세상이 아닙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이 권력을 위해 비굴해지고 부를 축적하기위해 치사해지는 세태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 세상 나라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몬문의 빌라도가 그 한 예입니다. 예수께 한 질문의 모두가 이 세상 나라에 대한 질문이고 자기를 출세가도를 위한 비열한 행동인 것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오늘 예배 때도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외쳐댔습니다.
셋째,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에 본분을 잊어서는 안되고 천국 시민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우리가 잘 아는독일의 실천 주의 철학 자인 본 훼퍼 목사님은 그의 저서 ‘성도의 공동 생활에서 “많은 사람은 들어줄 귀를 찾고 있다.그들은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들어줄 귀를 가지고 있을 가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야 할 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도 귀를 닫아버릴 것이다 오랬 동안 인내로서 이웃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자들은 이웃에게 웅변을 해도 빗나간 말을 하고 있는 것이요. 진정으로 이웃에게 말할 수 없는 자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그제부터 시작한 올림픽에서 경기를 하며 그들은 비로소 그가 속한 나라가 어디인 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이 아닌 올림픽에 참여함으로 그나라의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느끼며 또 최선을 다하는 경기로서 자기나라의 시민인 것을 보여 주듯이 우리 또한 행실로서 하늘나리의 시민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July 21, 2024
본문: 마태복음 25:34-40
눈 높이를 낮추는 신앙
오늘 우리가 있는 본문이 있는 마태 25장에는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옵니다. 특히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으로 다시 오실 때에 예수를 따르는 자를 구분하시는데, 한쪽은 양이요, 다른 한쪽은 염소로 분류하여 심판 하시겠다고 말씀 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40절을 보니 그 기준이 이세상에서 얼마나 지극히 작은 자를 예수님께 대하듯 얼마나 보살폈느냐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 인들은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처럼 하늘만을 바라보며 위에 것만 바라보며 가는 것을 신앙인의 제일 자세로 삼고 살아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직접 가르치신 우리 신앙인의 삶은 오늘 본문처럼 낮은 곳 소외된 곳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높은 하늘을 보라보는 순간은 오직 찬양 할때와 기도할 때 뿐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 세 사람을 말하려면 꼭 들어가는 대통령이 있는데, 그분은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그가 10살 되던 해인 1818년 10월5일에 그의 어머니 낸시 행크스는 세상을 떠나면서 어린 링컨의 손을 잡고 이런 유언을 하였다. “사랑하는 에이브야! 이 낡은 성경책은 나의 부모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다. 내가 여러 번 읽어 많이 낡았지만 우리 집안의 가장 값진 보물이란다. 나는 너에게 100에이커의 땅을 물려주는 것 보다 이 성경책 한권을 물려주는 것이 더 귀하다. 너는 이 성경책을 부지런히 읽고, 성경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다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 링컨은 어머니의 유언을 마음속 깊히 간직하고 성장하여 훗날 지극히 작은 자라 할 수 있는 노예들의 해방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 성도들이 낮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4가지의 분야가 있습니다.
첫째, 목마르고 굶주린 사람과 방황하는 사람들을 향해 눈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35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라 하였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목마르고 굶주린 사람을 보며 하는 생각이 “저들은 삶이 개으르고 태도가 잘못되어서저들이 그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이 목마르고 굶주린 이유를 생각하지 말고 거져 주라고 마태 10:8에 말씀하십니다.
둘째, 헐벗고 병든 자를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6절) 인간의 삶을 4자로 표현하면 “생로병사”입니다. 사람은 태어나고, 늙어가고 병들고 죽어갑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3대 비극은 죽음이라는 지점을 향해 늙어가고, 여러가지 병이 들어 고통속에 사는 것이며, 끝내 슬픔 속에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요한 11:35에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죄로 인해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슬퍼하신 것입니다.
그레고리 대제는 어느날 예배를 집전하다가 로마에서 굶주려 죽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교황은 입고 있던 예복을 벗어 놓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펼쳐 보이며 “이 로마에서 사람이 굶어 죽는다면 교황은 미사를 집전할 자격이 없다”가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교회법령을 정비하고 무능한 성직자들을 해임시켰으며, 막대한 경비를 들여 자선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는 선교할 때 문화적 우월주의로 야만족에게 그리스도교를 그냥 주입시키는 식이 아니라, 가능한 한 그리스도교와 그들의 기존 종교관습의 연결점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내용으로 승화시키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민족의 문화를 존중하는 선교의 이러한 토착화 방식은, 지역민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셋째,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는 것입니다. (36) 사람이 대개 옥에 갇히는 경우는 어떤 범죄로 인해 그곳에 들어 갑니다. 예수께서 의도하시는 것은 그 사람이 비록 죄인이어서 옥에 갇히거나 비참한 상황에 있더라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한국의 사회 상황 중에서 안타까운 현상 중에 하나는, 어떤 유명한 사람이 범죄했다고 방송이나 internet에 보도되면 즉시로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을 죄인으로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남을 정죄하는 일에 습관화가 되 있는지 아직 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나지 않았는데도 범죄자 취급을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비록 범죄자라도 비판하지 말고 측은히 여기고 위로해주라는 것입니다.
끝으로, 미국 대통령 중에서 재임 기간 때 삶 보다도 퇴임 후의 삶이 더 미국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대통령이 있습니다. 바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 높이 때문일 것입니다.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수렁에 빠진 공화당을 꺾고 8년 만에 민주당 정권 재창출을 이루어낸 장본인으로, 재임 도중 도덕주의 외교, 볼커 쿠데타라 불리는 연준의 초고금리 정책, 가정폭력청 및 연방 교육부 신설, 캠프 데이비드 협정 등 여러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재임 기간 내내 경제 지표가 안좋았고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에서의 미흡한 대응으로 지지율이 하락해 로널드 레이건에게 4년만에 정권을 넘겨줬다. 퇴임 이후에는 "사랑의 집짓기" 등 여러 자선활동에 참여하고 비공식적인 외교 활동으로 세계 평화를 도모하는 등의 행보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이에 대한 공로로 2002년 전직 대통령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를 두고 지미 카터를 "최고의 전직 대통령"이라고 농담삼아 부르기도 한답니다. 뒤에 보이는 사진은 인혁당 사건 때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유진곤 씨의 아들 유동민 어린이가 지미 카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카터가 박정희 정부에게 권유해서 유진곤 씨는 풀려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박물관에 편지 전부가 남아 있습니다.
July 14, 2024
본문: 에스라 8:18-23
예언자 적 삶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영적으로 인도하는 두 구룹이 있는데 그것은 제사장과 선지자들입니다. 제사장은 성전에서 백성을 대표하여 제사를 드리고 또, 백성의 영적 문제들을 지도합니다. 그리고 선지자, 또는 예언자들로 불리는 사람들은 그 시대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명령들을 백성에게 전하고 그릇된 길에서 돌이키게 합니다. 제가 웃고자 해서 여러분들에게 넌센스(Nonsense) 퀴즈문제를 하나 드립니다. 성경에서 제일 예언을 잘하는 사람은 누구일 까요? ‘미리암’ 입니다. ‘선지자’란 우리 말의 뜻은 ‘먼저 알다’ 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는 500여회 나오는데, 구약에는 ‘나비’ ‘네비’란 말로 쓰여 있고, 신약에는 ‘프로페테스’로 쓰여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낭독한 본문에는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분을 함께 담당했던 사람이 나오는 데 그의 이름은 ‘에스라’입니다. 그의 이름의 원어적 의미는 “하나님은 도움이시라”는 뜻입니다. 본서 7:11-13에 보면 “여호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의 학사인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 초본은 아래와 같으니라.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사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조서하노니”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난세에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모세의 형인 제사장 아론의 16대손이라고 7:5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50십여년 만에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1차로 B.C 537에 본국으로 귀환합니다. 그리고 80여년이 지난 B.C 458년 아닥사스다 왕 때 2차로 포로귀환이 이루어지는데 이때의 인도자가 된 에스라의 활동 상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에스라가 본장 15절에서 제사장 들 중 레위 자손을 한명도 찾지 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족장중에서 명철하고 신실하고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수종들 자를 모으기로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제사장을 하면 들어오는 것들이 많지만 선지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른 말을 핍박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도 상황은 다르지만 교회는 제사장적 직분을 행하는 사역자는 많지만 참된 선지자는 많지 않습니다. 2022년 초 미국의 총 교회수가 13만개 이상이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 목회자 수는 2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교회는 ‘종교 연감’에 따르면, 기록된 교회 수는 약 6만 개로, 목회자 수는 13만여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중에 정말 선지적 목회자 수는 얼마나 될까 하고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정지척 포로가 아닌 영적 세계의 포로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의 계교에 넘어가서 악의 세력의 포로로 잡혀있는 백성들이 많다는 사실이니다. 그런데 이 시대 속에서 목회자만 원망하지 말고 우리 평신도도 이제는 선지자 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루터가 ‘만인 제사장설’을 주장한 것처럼 ‘만인 선지자설’도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이 시대 속에 우리는 어떤 선지적, 예언자적 삶을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이 시대를 바라보며 영적 슬픔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1절에서 에스라는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 중에 참된 주를 위한 전승을 이어가는 인도자와 온전한 영적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가슴 아파했습니다. 9장 5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과거 죄악을 돌이키며 그가보인 모습이 있습니다.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대로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14년후에 3차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귀국하여 성벽을 중수한 느혜미야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1:4,5절에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손하고 삶속에서 기도하는 온전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21절에 “때에 내가 아하와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라 하였습니다.
셋째,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어도 하나님 앞에 자복하며 또한 다른 사람과 화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0:1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고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시대는 세상 사람들 뿐만 아니라 교인 중에도사탄의 포로가 늘어갑니다. 심지어 사역자 중에도 사탄의 포로가 되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벧전 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깨어나다’는 의미 ‘에게이로’는 병,죽음, 파멸에서 떨치고 일어나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시대를 직시 하고 모든 악습을 장악하고, 우리를 사로 잡고 것들 에서 깨어나 시대를 일깨우는 선지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July 7, 2024
본문: 누가복음21:29-36, 골로새서 4:2-6
깨어 있는 성도
지난 주는 248번째를 맞이하는 미국의 독립 기념일이었습니다. 건국한지 250년이 다되어 가는 미국은 국내외로 여러가지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내적인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인종적 대립 문제, 종교적 문제 등이 있고, 사회적으로 있는 문제 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여러 약물의 중독을 들 수 있습니다. 얼마전 한 단체에서 미국에 와서 10년이상 와서 사는 외국인에게 미국에 와서 느끼는 특이한 점 몇 가지를 물었는데, 그 중에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이 미국 어딜 가나 나는 마리화나 냄새라고 했답니다. 이제는 대부분의 주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성장기에 경험한 사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음 단계의 중독 약물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요즘에 미국에서 헤로인 이상으로 심각한 복용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이 펜타닐(fentanyl)이라는 약물인데, 펜타닐은 중독성이 높으며 건강한 일반인도 2mg이상의 극소량만으로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위험한 약물이다. 최근 일부에서 오락용 마약으로 퍼지면서 오남용 사례가 급증하고 있는데, 2021년 미국에서 펜타닐은 가장 많은 과다복용 사망자를 낸 약물이었고 한 해 동안만 7만 명이 넘는 사람이 펜타닐 과다복용으로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 성도들은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깨어라, 깨어 있으라’라는 말씀이 57번 이상 나옵니다. 그런데 ‘깨닫다’는 것까지 합하면 240회입니다. ‘깨어 있으라’를 반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보다 졸거나 자는 시간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 ‘깨어’라는 말은 원문에 ‘아그뤼프네이테’란 헬라어로 기록되었는데, 우리 시대의 흐름이나 어떤 사건의 모든 상황에서 ‘민첩한 통찰력’을 가지라는 뜻과 ‘정확한 판단력과 분별력’을 가지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정신을 차린 상태’를 의미하는 뜻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로 서지 못한 상태는 정신을 차리지 않고 졸거나 잠들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또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고 어떤 계획도 없이 바람 부는 대로 군중의 심리대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는 상태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한평생 영으로 깨어있을 뿐만 아니라 육체의 정신력, 판단력이 깨어 있어 민첩한 삶을 살아가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생각하면서 은혜받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첫째, 시대적 분별을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눅 21:34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여러가지 세상 것에 중독된 상태를 방탕함과 술취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방탕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조심해야 합니다. 이 말은 그 무엇보다도 자신 스스로를 제일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를 조심하고 다른 어떤 사고를 조심할 것 보다, 제일 무서운 것이 자신이고 스스로를 경계하고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어려워졌다면 가장 큰 이유는 남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될수 있는지 예수께서 말씀해 주시는데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조심하지 않으면 여기저기로 끌려 다닌다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 앞에 바르게 서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21:36). 주님께서는 모든 역경과 환난을 이기기 위해서 항상 기도에 힘쓰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침착하게 하고 바른 생각과 바른 판단을 하게하며 이해하게 하고 용서하게 하고 스스로의 얼굴에서 주름살을 없애는 기적을 낳습니다. 성도는 깨어 있지 않으면 시험에 들게 됩니다. 우리들이 날마다 앞을 바라보고 깨어 생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꼭 나의 인생에 큰 일이 닥쳐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에 즉시 적응할 수 있도록 자신을 늘 각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 마음이 현재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 나의 헛점이 무엇인가 항상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셋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마태 26:40,41에 보면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제자들과 함께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제자들에게 자신의 아픔을 나누시고 깨어 있으라고 부탁하신 후 땀방울이 핏방울로 변할 정도로 인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세 제자는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과 달리 육신이 연약했고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 사명에 깨어있지 않으면 사탄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만난 그날부터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사명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게으르면 한없이 멀어집니다.
기도는 마음을 맑게 합니다. 아침 기도가 중요한 것은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그날의 살 동기를 기도로써 맑게 하기 때문입니다. 밤 기도가 필요한 것은 하루의 때 묻은 영혼을 그날이 다 가기 전에 기도로써 맑게 씻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일을 하는 성도도, 아무리 재주를 타고난 사람도 기도로써 그 영혼의 문을 하나님 앞에 열어놓고 있지 않으면 큰일을 하더라도 점점 의미를 잃고 많은 은사도 차차 생기를 잃어 시들게 됩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골4: 2 에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에스라8:21-23에서 에스라는 기도를 보병이나 기병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음식이나 수면보다도 더 필요하다고 보셨습니다.(마4:2) 사도들은 기도를 아주 중요한 크리스천의 생활로 보았습니다.(행6:4)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 나를 창조하시고 지금 돌보시고 내 앞길을 주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앞에 앉은 것이며, 자녀로서 대화하는 것이며, 존귀와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자식으로서의 내 심정을 의논하는 것이고, 나의 곤란과 어려움과 고독을 아뢰는 것이며, 꼭 필요한 것을 욕심 없이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에는 틀에 박힌 문구나 격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근소근 아버지와 이야기하면 됩니다. 썩지 않고 죽지 않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뛰어 넘을 수 없는 곳에 올라가게 합니다. 기도만이 모든 유혹을 이기게 합니다. 예화) 막달라 마리아처럼
말씀에 우리를 향해 “깨어 있으라”하는 것은 성도들이 사는 세상은 어둡고 캄캄한 밤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성도들이 깨어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서로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우리는 그들과 한 마음을 가지며 그들과 함께 길을 걸으며 사랑을 나누며 함께 빛을 내어 어둠을 밝히며 걸어야 합니다.
June 30, 2024
본문: 이사야 55:3-9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초대 (God's Invitation to Us)
오늘 본문 1,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주전 690년경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소리쳐 물건을 파는 장사꾼처럼 와서 물과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외칩니다. 본문에 “돈 없이, 값없이” 물건을 판다고 합니다. 물건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저 그의 백성에게 주시기 위해서 외칩니다. 장사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풍성한 상을 차려놓고 손님을 초대하는 주인의 모습입니다. 포두주와 젖은 그 시대의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애써 번 돈으로 양식을 사지만, 그 양식이 굶주림을 해소해주지는 못합니다. 여기서 “양식이 아닌 것,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은 우상숭배를 가리킬 것입니다. 일부 바벨론에 유배되었던 민족들은 이방 신들에게서 살길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 기름진 것”은 예언자가 선포한 구원의 말씀 즉, 약속을 가리킵니다. 우상들이 주는 일시적 포만감에 빠져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말고, 예언자가 선포한 구원과 해방의 약속으로 갈증과 배고픔을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할 때만 이스라엘은 현재의 절망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 서두는 예수님께서 친히 외치신 마태 11:28-30의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오늘 저는 지금부터 2700여년 전 이사야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그의 백성에 대한 초대의 말씀 여러분과 함께 상고하기를 원합니다. 이 시대를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말씀의 초대를 하고 계신지 적용해 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들을 초대하실 때 우리들의 언어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무슨 영적 고차원적 언어를 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이해할 수 있는 인간적 언어로 우리를 주님 앞으로 초대하십니다. 사실 저는 이 본문 말씀이 너무 세속적인 표현이라 생각하여 보통 때 잘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자세히 묵상해 보면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 삶의 낮은 곳에까지 찾아오시는 주의 인애하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느 선교사님이 아프리가 오지에서 선교를 하셨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열정을 쏟아 선교활동을 하였으나, 10년이 지나도록 한 영혼도 주 앞으로 인도하지 못해서 이제 모든 것을 접고 떠나려고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노인이 다가와 그를 측은이 생각하여 하는 말이 “당신은 이곳에서 항상 “어린양이신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데 이곳에 관습에서 어린 양은 가장 기분 나쁘고 불행을 가져다주는 동물입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는 동물은 아기 돼지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마음을 돌이켜 다시 마을로 들어가서 “아기 돼지인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기 시작했고, 후에 많은 열매를 맺었다고 합니다.
둘째, 크고 요란하게 우리를 부르시는 것보다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열왕기상 19:11-12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셋째, 우리에게 용기와 자부심과 소망을 주시며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5절에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제 이스라엘을 들어 당신 영광을 온 땅에 선포하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의 수치와 유배에 종지부를 찍고 그를 영화롭게 하실 때 이스라엘과 민족들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됩니다. 이스라엘이 부르면 민족들이 달려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화를 통해 온 세상에 여호와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에 자부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말에 ‘쪼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거나 하나님의 자녀로 살 때 너무 소심하고 쪼잔한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넷째, 하나님은 악이나 불의에서 속히 돌이키는 사람을 주의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7절에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가 강권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머무적거리거나 또 후에 돌아오려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속히 그 길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때를 아는사람, 주의 시간을 감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후6: 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1,2절의 의미는 영적인 포도주와 젖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얻을 일시적인 것들을 열정을 쏟지 말고,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것들을 위해 자신을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June 23, 2024
본문: 요한복음 7:37-44
생수의 흐름 같은 신앙
본문: 요한복음 7:37-44 6-23-2024
세상 사람들이 진리라고 하는 말 중에서 “물은 고여 있으면 썩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면서 정화가 되고 산소를 스스로 일으키며 주위에 또한 생명력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는 일중에서 첫째가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을 받아 세상에 비추어 그 주위를 밝히는 일이고, 둘째는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아 세상에 물처럼 흐르게 하여 정결하게 하고 또한 세상에 생명력을 주는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낭독한 본문은 우리에게 두번째 사명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7장은 예수님이 30세부터 3년 반 사역을 하셨다면 그 최후 6개월 안에 있었던 일이다. 유대인들 사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적대감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 지역 다니기를 즐겨하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다니셨습니다. 6장은 갈릴리로 다니실 때의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일곱 절기가 있지만 그 중 세 가지 절기가 가장 중요한 절기이다. 유월절·오순절(칠칠절이라고도 함), 그리고 초막절(장막절이라고도 함)입니다. 6장 내용은 유월절 때 일이고, 7장 내용은 초막절 때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은 구약을 배경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6장의 유월절처럼, 7장의 참된 초막절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 실제이십니다. 모든 구약은 다 그림자입니다. 초막절은 유대력 7월 15일부터 8일 정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초막에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 초막을 짓고 생활하는 절기로, 물의 축제이기도 합니다. 초막에 살 때 반석에서 생수가 난 것을 기념하여 실로암못의 물을 떠다 행렬을 지어 성전문에 붓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37-39절을 보면,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참 생수를 주기 원하셨습니다. 이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과 비슷하지만 본질은 차이가 있습니다. 4장 말씀은 개인이 누릴 생수, 일단 예수로부터 생수를 마시면 내적으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는 말씀이며 7장 말씀은 사역을 위한 생수의 강을 말한 것입니다. 이 구절의 ‘성령’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38절의 ‘배’라는 단어가 헬라어에 ‘코일리아스’라고 표현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가슴’ ‘자궁’을 의미 합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는 그 가슴에 성령을 물처럼 넘치게 받아 그 배에서 세상을 살리는 생수의 강이 흘러 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어떤 성령의 흐름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세상의 모든 작은 흐름들을 다 감싸 안고 흐르는 큰 줄기의 물처럼 예수의 진리로 흐르게 해야 합니다. 큰 강물은 작은 시냇물을 다 받아들여 더 크게 흐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여러 갈래의 교리와 사상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라는 큰 진리의 흐름에 흡수되어 한 줄기로 흘러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성경에 이름과 같이”란 말씀이 있는데, 많은 성경학자들이 성경 어디에도 그 말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묵상할 때는 한 문장만 발췌해서 보는 것보다 문맥상의 흐르는 뜻을 발견하여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출17: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와 민20:11의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그리고, 스가랴14:8에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는 표현 등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단들이 성경구절 잔절씩 만 발췌하여 인용합니다. 성경 문맥상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둘째, 세월의 흐름처럼 성령의 역사의 흐름도 병행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신앙의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의 시간은 제한적이고 유한한 의미의 ‘크로노스’이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카이로스’입니다. 예화) 서울의 105평짜리 교회
셋째,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입니다. 위에서 먼저 친절과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사야 58:11에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했습니다. 본문에서 초막절에 실로암 연못에서 길러온 물을 제단 한 편의 큰 항아리에 붓는데, 이 항아리 밑부분에는 배수관이 연결되어 있어 제단 아래부분으로 흐른다. 예화) 윤 영민 목사와 손자들, 모춘임 권사의 삶.
결론적으로, 앞에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중 ‘배’란 단어 ‘코일리아스’의 원 뜻은 ‘가슴’과 ‘자궁’의미한다고 설명 드렸습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를 가슴으로 전하며, 또한, 여성의 자궁처럼 생명을 잉태하고 탄생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말로만 발설하는 진실이 없는 삶보다 가슴으로 진실을 전하고 생명을 잉태하고 탄생시키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큰 흐름의 강 줄기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여 감싸 안고 사는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Casting Crowns의 찬양 ‘Thrive’의 일부 가사입니다.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우리는 결코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을 더 갈망합니다. 주의 생수는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우리의 영혼을 넘치게 하십니다. 한 가지 열망으로 넘칩니다.”
June 9, 2024
본문: 히브리서 10:19-25
그리스도의 날에
“히브리서는 오늘날 신약의 중요한 책들 중에서 가장 적게 알려진 책이다.” 고 신학자 Purdy는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히브리서를 생각하면 믿음 장, 대제사장 이신 예수님에 대한 표현 등을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심오한 복음적 신학적 교리들이 나타난다. Ress라는 신학자는 “히브리서는 수필처럼 시작하고 설교처럼 진행하고 편지처럼 끝 맺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6일은 한국의 현충일이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순국하고 희생한 선조들을 기리고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사실 ‘기념’이라고 말은 기억하고 깊이 상념해야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10장에는 11장에 나오는 믿음과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내가지의 사건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4가지의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첫째,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신 날을 기념하고 대뇌이어야 합니다.10-12절에 보면,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단번에 되신 날을 평생 영혼 깊은 곳에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14절 말씀처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고 하고 19,20절처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한 것이 때문입니다.
둘째, 부활하신 예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신 ‘그리스도의 날’을 평생 기념하며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그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도 그것입니다. 22절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갈 2:20) 예화) 사람의 사전 영향력과 사후 영향력.
셋째, 환란과 핍박속에도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날을 만드는 것을 잊고 삽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영접하고 난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 23-25절 말씀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24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하였습니다. 구속 받은 자의 셋째 의무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화) 야구에서 희생 타격을 한 선수를 격려하는 모습.
넷째, 장차 다가올 그리스도의 날을 예비해야 합니다. 마태16:28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하셨는데 주님이 제자 중 몇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환상으로 볼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17:1-8의 세 제자가 본 변화산 사건 사건과 사도 요한이 본 요한 계시록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주님이 처음으로 고난과 십자가의 죽임 당함을 예시하신 후 있었던 사건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고난이 다가올수록 영적 은혜와 환상을 통하여 위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미래에 올 재림만 너무 고대하지 말고 지금의 환란과 핍박속에서 더욱 영적으로 말씀과 기도에 전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드리는 찬양 중에서 예수의 귀한 이름을 의미를 되새겨 보았습니다. 내 안에 있는 가장 귀한 것인 예수의 이름은 세상의 금 은 보화 보다 세상 지식 명예보다 소중합니다.세대가 변하고 문화가 변해도 그 이름만은 끝까지 붙들고 가야합니다.
June 2, 2024
본문: 호세아 6:1-6,
빌립보서 3:7-12
한 걸음 더 나아가
지난 주는 감리교의 교단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요한 웨슬리의 회심을 기념하는 날이 지난5월 24일이었습니다. 그가 32살이던 1735년 어느 가을 날 그는 미국으로 선교 여행을 가기 위해 동생과 함께 배를 타고 항해하던 중 심한 풍랑을 만났습니다. 배에 탄 영국인 80여명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27명의 모라비안 교도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함께 모여 오히려 찬송을 기쁘게 드렸습니다. 좐 웨슬리가 그들에게 다가가 담대한 믿음의 이유를 묻자 그들이 질문한 말이 “Do you Know Jesus?”입니다. 17세에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 신성 club을 조직하는 등 철저한 원칙적 신앙주의 자(Methodist)라고 불릴 만큼 열심히 신앙활동을 한 그에게는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이 스데반의 순교 후부터 시작된 것처럼 그는 그 순간부터 자신의 신앙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때문인지 2년여의 미국 선교는 거의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모라비안 교도에 대해 살펴보면, 모라비안 교회의 탄생은 세계사에도 이름이 잘 알려진 ‘진젠돌프’라는 사람을 통해 이루어진다. 모라비안 교회가 된 것은 모라비아는 옛 체코슬로바키아의 한 행정구역으로, 1029년에 보헤미아에 합병되었다. 진젠돌프가 평생토록 가졌던 한 구호가 있다. “나는 하나의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후 웨슬리는 영국으로 돌아와 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이트의 모라비안 교회 집회에서 비로서 신앙의 회심을 경험한다.
오늘 본문의 호세아 선지자는 BC 750년에서 북왕국이 멸망한 BC 722년경까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을 했던 선지자입니다. 당시 여로보암 2세가 죽고 난 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패역한 상황이었습니다. 호세아는 4장 1-2절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뒤이음이라.” 여기의 ‘안다’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야다(yada)인데 ‘체험적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즉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았고, 열심히 제사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지식으로 머리로 교리적으로만 알았지 인격적인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도 살지 못했습니다.
본문 3절에서 왜 하나님의 선지자 호세아는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강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무엇을 알라는 말씀입니까? 6절말씀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헤세드의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음녀와 같이 방탕한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고멜과 같이 세상 연락을 좇아 음란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실하신 사랑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호세아서 본문에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하는 이유가 세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주께 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Philip Katz는 컴퓨터 파일을 압축하는 Zip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여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2000년 4월 14일 미국 중서부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싸구려 호텔방에서 시체로 발견 되었습니다. 마시다 만 위스키 병이 왼손에 쥐어져 있고 머리는 무엇에 부딪혀 패어 있었습니다. 한때 수백만 장자로 돈 많은 재벌이었던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23살에 획기적인 압축프로그램을 개발했고 PK웨어라는 회사를 차려 Microsoft와 IBM등 세계적인 회사들을 고객으로 확보하여 일순간에 백만장자로 뛰어 올랐고 주체할 수 없이 돈을 벌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집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주님의 통제를 받고 주님 품안에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합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하나님의 통제를 받지 않고 살려고 하십니까? 불편하고, 싫어도 하나님의 통제를 받고 사는 것이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다 용서하시고, 하나님이 가지신 온갖 좋은 것으로 먹이시고, 입혀 주십니다. 본문 1절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라” 돌아가는 것은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즉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죽음의 골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피 끓는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주께로 돌아가는 것만이 삶의 길이라고 외칩니다. 신앙생활은 중심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를 알게 된 후 이전에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갈지자 행보를 계속하는 까닭은 아직 중심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기독교 작가이며(The Jesus I Never Knew《우리가 알지 못했던 예수》)의 저자인 Philip Yancey가 쓴 1996년 복음주의 기독교출판협의회(ECPA)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던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 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스페인 선원들이 대서양을 건너 남미 대륙에 도착하여 스페인 선원들이 탄 돛배가 아마존 강 상류에 도착했는데, 강폭이 너무 컸기 때문에 선원들은 아직 대서양에 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긴 바다를 항해한 그때 선원들 중 여러 사람이 갈증으로 죽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짠 바닷물 위에 떠 있는 줄로 알았기 때문에 강물을 떠 마실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풍부한 생수의 한 복판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갈증으로 죽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기본적인 지식을 알지 못한다는 교훈을 알려 줍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정반대의 상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망망대해가 다 강물 인줄 알고 마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로 주 앞에 거하며 살기 위해서입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은 일제 때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 외솔 선생의 집 앞마당이 항상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에 마당을 쓸고 가는 낯선 청년 있었어요. 어느 날 이웃 사람이 청년에게 매일 아침 마당을 쓰는 까닭을 물었어요. “저는 함흥 감옥에서 선생님과 한 방에 있었을 때 제가 배탈이 나서 크게 고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보시고 굶.으면 낫는다고 하시며 혼자는 어려울 터이니 같이 굶자고 하시며 종일 저와 함께 굶으셨습니다. 선생님은 밤늦게까지 저의 아픈 배를 어루만지면서 정성껏 돌봐 주셨지요. 아무도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는 감옥에서 받은 은혜를 어떻게 해서라도 갚고 싶어 그리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의 앞에서’란 말은 그의 얼굴 앞에서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까닭은 항상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있기 원 함입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우리가 사라지면 정말 근심하십니다. 죽었던 우리를 살려주셨는데, 자기 욕심대로 사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프레드릭 마이어(F.B. Meyer)가 말하기를. “인간에게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자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일으킴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영원히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입니다.
셋째로 ,내 삶 속에서 주를 맞이하고 모시기 위해서 입니다. 본문 3절에 보면. “새벽같이 어김 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호세아는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은혜는 예기치 않게 찾아옵니다. 마음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사람은 알아차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심코 지나칠 것입니다. 삶이 어려울수록 하나님은 먼 데 계신 분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힘써 하나님을 알 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맞이할 수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 하나님은 익숙한 모습으로도 다가오시지만, 때로는 아주 낯선 모습으로도 다가오십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 때 주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결론: 기독교회와 이단교회의 건물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단 교회는 대개 십자가를 크게 세우지 않습니다. 십자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예수를 생각하게 합니다. 만유 일력의 법칙으로 유명한Isaac Newton은 노년에 기억상실증으로 이름도 나이도 몰랐습니다. 답답해 하던 제자들이 “그렇다면 선생님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다만 아는 것은 두 가지인데 나는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내 구주시라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합니다. 힘써 주님을 아는 것만이 사는 길입니다.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돌아가는 그 길만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길 임을 아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May 26, 2024
본문: 사사기 6: 11-18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
지금 세계는 21세기 들어 가장 큰 전쟁의 위험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이란의 참전으로 더욱 확대의 상황으로 가다가 이란 대통령의 사망으로 약간 소강상태를 보이지만, 미국 내에서는 팔레스틴을 지지하는 세력과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큰 사회적 문제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크레인과 러시아의 전쟁은 유크레인을 지원하는 나라와 러시아의 고성능 무기의 사용으로 동구권으로 확대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세계의 언론에선 3차 대전쟁의 위험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지금부터 3500년 외국의 침략으로 초토화 되고, 압제 당하고,약탈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부르신 사사 기드온의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가나안 땅의 들어온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 기원전 1200년경~1050년경까지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시대가 옵니다. 이 시기는 문명적으로 ‘후기-청동기시대'가 끝나고 '전기-철기시대'가 시작되는 시기로, 성서에서는 '사사 시대'라고 합니다. 사사 시대를 단순 계산하면 모두 410년이 됩니다. 이 사사 시대는 총 12명의 사사가 각기 혼란의 시대에 나타나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고 이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5번째 사사입니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BC 1150년경입니다. 그를 여호와께서 부르신 때는 미디안이 이스라엘 침략하여 점령하고, 7년이상 모든 백성을 철저하게 억압하고 약탈하였습니다.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하려고 기드온을 부르시는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우리는 기드온을 생각하면 그의 300 용사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저는 먼저 하나님이 기드온을 부르실 때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본문에 나타난 기드온의 모습을 통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그는 자가가 맡은 일속에 위협이 가해지더라도 담대히 열심으로 일한 사람입니다(11절).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부르시어 사용하실 때 세상 일이지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미디안 사람들을 피해서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위해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는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자기 삶에서 의문점을 가지고 스스로 깊이 고뇌하는 사람이었습니다(13절).자신에게 나타난 주의 사자에게 하나님에 대한 의문점을 이야기 합니다. “여화께서 함께 계시면 어떻게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라고 반문하고 원망도 합니다. 13절에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입니다(15절).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라고 하며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보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와 그 후손들을 대대로 다스리는 왕으로 삼으려 할 때 그가 한 말이 8:28절에 있습니다.
넷째, 영적인 확실한 표징을 구하고 그것으로 확실한 신앙의 근거를 삼는 사람이었습니다(17절).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여호와 의 사자에게 요구합니다. 이 시대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표징은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그 말씀으로 신앙의 근거를 삼고 그 법도로 예배의 기초를 삼아야 합니다. 겸손함과 거룩함으로 드리는 예배의 모습이 그 사람의 신앙의 표징입니다.
그리고 예식을 갖추고 드리는 확실한 예배와 헌신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18,19절). 18절에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그가 가로되 내가 너 돌아오기를 기다리리라”하였는데, 그는 비록 염소 한 마리였지만 정성으로 준비한 예물을 가지고 예식을 행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는 장면은 창세기 18장에서 주의 사자들을 만나 대접하는 상황과 유사함을 볼수 있습니다. 주의 사자로 표현하기도 하고 여호와가 직접 말씀 것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은 주로부터 진정한 마음의 평안을 받습니다. 24절에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하였습니다. 요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역자가 된 사람이 주님이 주신 평안에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다 물질과 세상 명예까지 얻으려는 욕심을 갖는 사람이 많습니다.
May 19, 2024
본문: 사도행전 10:1-7
다시 새워지는 가정
이 시대 세계적인 영성 신학자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쓴 ‘다시 일어서는 목회’라는 책에서 지금은 교회의 기능과 역할들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입니다. 또한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의 기능과 목회의 전략을 다시 한 번 성경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 오늘날 교회가 맞고 있는 난국을 해쳐 나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의 가정 또한 이와 비슷한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 만물을 창조하신 후 맨 나중에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으며, 그리고, 하와를 창조하심으로 가정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이란 인간이 자진해서 만든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요 원리인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가장 바람직한 기독교 가정의 모형은 어떤 것인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이루어지는 가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가정이기 때문에 신앙의 주체인 나와 신앙의 객체인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돼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오늘본문 고넬료의 가정과 같이 경건하게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해야 되며, 백성을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는 가정이 돼서 그 영적생활이 하나님께 상달돼야 하겠습니다.
둘째,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 원만한 가정입니다. 가정에는 부모가 있고 그 부모를 통하여 주신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원만하고 바로 돼야 기독교적 참 가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가정이 되려면 성경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엡6:1-3에 자녀들에게는 '주안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6;4에 부모님들에게 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공덕을 알고 효성을 다해야 되며, 부모님들은 그 책임을 다하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요람을 흔드는 어머니의 손은 세계를 흔들수 있으며, 한 사람의 훌륭한 어머니는 100명의 교사보다 나은 것입니다.
셋째,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가 잘 설정되어진 가정입니다. 부부간의 참 좋은 관계도 역시 오직 성경말씀대로 살 때에만 가능하며, 이와같은 생활만이 참 기독교적 가정을 건설할 수 있는것입니다. 그 말씀이란 "아내들이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복종하라"는 것이며, 남편들은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그 아내들을 사랑하라" 는 말씀입니다. 이상의 세가지 관계는 한마디로 묶으면 "사랑"이라고 하는 한마디 말로 줄일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가정은 무덤과 같습니다. 오늘날 가정들이 House는 있으나 Home은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또 한가지 본문 속의 중요한 사실은 고넬료는 가족 외에 그의 곁의 식솔들 까지도 신앙을 가르치며 배려하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7절) 군인의 원칙은 상명 하복인데, 대 로마군대의 백부장이 진실한 신앙으로 부하에게 배려를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인에게 자초지정을 다 이야기하고 부탁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난달에 세계40국에서 총대들이 모인 감리교 총회가 있었는데 여기서 의결한 중요한 사항은 동성연애자의 목사 안수안의 가결이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이에 반대하여 탈퇴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인 교단을 대표하는 목사님의 해명이 참 가관입니다. ‘교회의 문은 세상 누구에게나 open이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평신도를 지칭하는 것이지 교회를 인도하는 사역자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을 토대로 하여 이에 대한 확실한 의견을 피력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2:3에 보면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자 중에 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 그 어떤 이 보다도 기적을 체험하며 은혜를 입었던 나사로도 예수의 정식 제자가 아니었다 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연약한 자나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소수 성애자들은 우리가 감싸 안아주고 사랑해 주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리더로 세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항상 교회의 사역자들은 검증의 대상이고 판단 기준의 대상이기에 그들을 대표자로 세워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인도자는 엄격한 판단과 기준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조금만 교회의 리더가 세상의 법과 도의는 물론이고 사람들의 기준을 넘어가면 가차없이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기에 그 사람들의 보호의 차원에서라 도 그들의 교회의 대표자로 세워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오늘날 사회전반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의 원인 파괴되어 가는 가정의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시인하고 있습니다. 차츰 시들어 가는 교회의 양적 질적 상황속에서 그리스도 안의 참된 가정을 다시 세워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속에 고넬료는 이방인이면서도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의 삶을 살며 세상사람들을 돌 보며 자신의 하속들을 배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직 로마에 기독교가 전파되기전 로마군의 장교로 지배지 인 유대의 신을 모신다는 것 만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온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경건과 구제의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크리스챤 젊은이들이 뜨겁게 주님을 찬양하고 주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결혼을 준비하려 할 때와 가정을 이루고서는 열정과 헌신이 사라지고 무너져 갑니다. 이제 우리의 가정들을 다시 일으켜 새워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 또한 고넬료의 삶을 본받아 사는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May 12, 2024
본문: : 시편 128:1-6,
에베소서 6:1-4
주 안에서 가장 복된 가정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고달픈 이민 생활 속에서 자신이 이국 사회에 적응하는 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셨을 터인데, 익숙하지 못한 이국의 문화속에도 자녀들 또한 일일히 챙기시느라 어느덧 이마와 눈가 와 목에 주름이 생기는 황혼기에 접어든 이 땅의 모든 어머니, 아버님께 하나님의 하늘만큼 큰 위로와 복이 임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새우신 인간의 제도 중 가장 오래된 것이 결혼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우리의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들에 복을 주시고 또한 복된 가정으로 세워 지기 원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또 행복한 가정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의 삶속에 행복함을 느끼는 사람들보다 불행함을 느끼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다는 것을 가끔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나 우리 가정의 행복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기억을 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믿는 성도들의 가정은 반드시 행복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주신 복속에 세운 가정이기 때문에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믿음의 가정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또 가정의 가장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가정이 행복할 수 있도록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믿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많이 노력하고 애써야 합니다. 복된 그리스도의 가정은 먼저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가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주로 섬기는 가정입니다.1절 말씀을 보시면“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여러분 이 세상에 복된 삶은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서 행하며 그 도에 행하는 것이 바로 복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 여호와의 도를 행하는 사람들이 이루는 가정이 바로 복된 가정이다. 하나님을 가정에 주인으로 삶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정에 모시고 사는 그 믿음의 가정이 바로 복된 가정이다.”온 가족들이 같은 신앙고백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가정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우리는 우리의 가족들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야 되겠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우리 자신들이 더욱 본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안에 복된 가정은 하나님이 중심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중심의 신앙, 말씀 중심의 신앙을 가지고 우리의 가정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녀들이 태어나서 자랄 때 자녀들에게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쳤고 하나님 중심 사상을 가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시련과 환란속에서도 유대 민족들이 역사속에 꿋꿋이 버텨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믿음의 덕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구약성경 신명기 6장 4절에서 9절에 있는 말씀을 흔히들 우리가 쉐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국민 교육 헌장이라고 말합니다.“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이렇게 시작되는 것인데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고 자라면서 이 쉐마에 의해서 교육받고 훈련을 받습니다.
둘째, 정당하게 얻은 물질로 가정경제를 꾸려나가는 가정입니다. 2절을 보면,“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는 이 말씀은 내가 이마에 땀을 흘리고 한주간동안 열심히 일해서 수고한 그 수고의 대가를 가지고 가정 경제를 꾸려가는 그 가정이 가장 복된 가정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가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원리는 노동을 천시 여기지 않고 노동을 귀한 것으로 여깁니다. 사도바울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살후3:10)”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미국을 만들어냈고, 오늘의 서구 문명을 만들어냈습니다. 서부 개척시대에 한 마을을 건설할 때 많은 사람들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이 구호를 붙여놓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독일의 프로이센 왕국이 세워지고 확장되어 나가는 과정 속에서도 많은 칼빈 교도들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 하는 구호를 붙이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우리가 ‘막스 베버’의 이론을 인용하지 않아도 세계 기독교 국가들 중 특별히 장로교 칼빈주의의 원리에 입각해서 번성한 나라들은 부강한 나라들이 됬습니다. 장로교의 원리인 칼빈주의의 원리는 근로를 노동을 굉장히 신성히 하고 중요시 여깁니다. 그래서 땀을 흘려서 열심히 일해서 번 것을 저축하고 그것을 통해서 가정 경제를 꾸려 나가는 것에서 바로 자본주의의 원리가 탄생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선포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그냥 단순하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만 말하지 않고 엿새 동안 힘써 일하라고 했습니다. 엿새동안 힘써 일한 사람이 이레째 되는 안식일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어 하나님께 온전히 그 안식일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루를 쉬는 그런 날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복은 반드시 근로의 축복으로 생겨나는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허황된 생가으로 일확 천금을 노리는 것이아니라, 내가 열심히 일해서 정말 약소한 소득 이지만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그것을 가지고 절약해 쓰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큰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여러분들은 진정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가족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가정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3절에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그랬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유대인의 가부장적인 한 가정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내 아내의 모습과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다. 이스라엘에서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는 가장 풍성한 결실을 상징하는 그런 나무인 것입니다. 아내도 자식도 우리 가정의 축복의 열매입니다. 여러분 가족 상호간에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면서“당신은 나의 축복의 열매입니다.”아내가 남편에게 고백하고 남편이 아내를 보면서“당신의 나의 축복의 열매입니다.”부모가 자식을 바라보면서“너는 나의 축복의 열매다.”자식들이 부모를 바라보면서“부모님은 우리의 삶의 축복의 열매입니다.” 예화)거스 히딩크의 ‘위기의 한국 축구’
끝으로, 아름다운 신앙유산이 전수되는 가정이 복된 가정입니다. 링컨의 어머니 낸시는 황무지 개척자의 아내로서 두 자녀의 어머니로서 가난한 환경 속에서 굳건히 살았던 여성이었습니다. 매일 링컨에게 성경을 읽어주며 신앙을 심어주는 등, 그녀는 농사꾼의 아내로서 땅 개간과 함께 바쁜 시간을 지내면서도 자녀들을 돌보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낸시는 어린 링컨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양육하지는 못했지만 자연 환경 속에서 풍부한 상상력과 감정을 가지도록 자녀들을 양육한 자상한 어머니였습니다. 무엇보다 낸시는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알기 쉽게 자세히 가르쳐 주는 성품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1818년 10월 5일 링컨의 어머니가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나마 다니던 초등학교 공부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링컨의 어머니 낸시는 풍토병으로 죽으면서 링컨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아버지와 누나의 말을 잘 듣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유언했다고 합니다. 링컨이 얼마나 어머니를 존경하고 감사하였는지 그의 친구 빌리 헌던에게 한 고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내가 아직 어려 글을 읽지 못 할 때부터 어머니께서는 날마다 성경을 읽어주셨고 나를 위해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으셨네. 통나무집에서 읽어 주시던 성경 말씀과 기도 소리가 지금도 내 마음에 울리고 있네. 나의 오늘, 나의 희망, 나의 모든 것은 천사와 같은 나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네." 결론적으로 여호와께서“시온에서 내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네 자식에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를 이어서 믿음의 귀한 유산이 전수되는 가정이 주 안에서 복된 가정 행복한 가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가정들이 정말 이런 복된 가정, 행복한 가정들이 다 되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이런 말씀 안에 복된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가정, 이 복된 가정은 바로 천사들도 흠모할 만한 가정이라고 믿습니다.
May 5, 2024
본문: 창세기 5:21-27,
히브리서 11:1- 6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는 자
가정의 달인 5월 첫째 주에 여러분의 가정 속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며, 하나님 동행하는 여러분의 가정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담 이후에 족보가 두 가지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하나는 가인의 족보이고 다른 하나는 셋의 족보입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 전의 4장 후반부를 보면, 가인의 족보가 나옵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는 범죄 이후에도 죄를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창세기 4:16을 보니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던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떠나는 것’은 ‘피하거나’ ‘달아나다’의 의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떠나 더욱 멀어지게 됩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가인의 후손과 같이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4장 후반부터 시작하여 오늘 본문에까지 셋의 족보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대신하여 셋을 자녀로 주셨습니다. 셋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이름은 에노스였습니다. 성경은 비로서 사람들이 그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창 4:26을 보면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라고 하였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떠나 살아갔지만, 셋의 후손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입니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 분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데서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기쁨과 소망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분을 예배하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셋의 육대손이 바로 에녹이었습니다. 셋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으로서 믿음을 지키는 믿음의 혈통을 지켜갔습니다. 그리고, 에녹은 영적으로 어두운 시기에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 인정함을 받는 자는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입니다. 누군가와 동행하기 위해서는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 길을 걷는 것은 고역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한 두 번 함께 길을 걸으며 동행할 수 있지만, 오랜 기간 함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마음이 서로 맞아야 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암 3:3) 라고 했습니다. 서로 뜻이 같아야 함께 길을 걸어가며 동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법을 발견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신약의 본문 히브리서 11:4에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왜 아벨의 제사만 하나님께서 받으셨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과 뜻을 달리했습니다. 그들은 가인의 길을 따라 가기로 선택하고 어두움의 왕인 사탄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로 결단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자신들이 만든 성취를 찬양하며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녹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의지를 굴복시킵니다.
또 하나, 에녹이 하나님과 평생을 동행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예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사람이 그의 아들 ‘므드셀라’입니다. 그 이름은 ‘화살의 끝 부분’이라고 여러분도 아시는 대로 므드셀라의 죽던 해에 노아의 홍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노아는 에녹의 증손자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심판의 예시를 받았기에 그의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께 헌신하며 동행했던 것입니다. “내 아들의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인데…”하며 그는 삶을 겸손하고 충실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세상의 심판을 므두셀라의 삶을 천년 가까이 연장하시면서까지 기다리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에녹의 나이가 365살일 때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 가셨는데 숫자는 우리의 1년 날짜수와 똑같습니다. 이 의미를 우리가 잘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세대를 사는 우리는 1년 365일을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분과 동행해야 한다는 것을요. ‘에녹’이란 이름의 뜻을 ‘시작하다’ 또는 ‘헌신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이 아닌 오늘부터 주님께 헌신하고 365일 주와 동행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pril 14, 2024
본문: 신명기 33:26- 29, 누가복음 17:20,21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우리 기독교에서는 ‘천국을 소유한 사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 자세히 표현하면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드리고 그의 영이 그 속에 임재하여 이도하는 삶을 사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참되게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잘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나 요한, 바울을 안다고 해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를 알고 그것을 스스로 짊어지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통치한 후 하나님의 예시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죽게 됩니다. 산에 올라 죽기 전 이스라엘 백성을 지파들을 모아놓고 축복을 내리는 선언을 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이 선언의 마지막 부분으로 진정 행복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선언하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하여 새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는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능력 있는 손에 붙들려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유연한 손이며 강력 있는 손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변형시키시는 하나님의 손 아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능력 있는 주의 손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 갑니다. 존 칼빈은 말하기를 “죄로 타락한 우리 인간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이 거의 일그러져 간신히 그 형체가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손에 붙들려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능력 있는 손으로 성도들의 속에 있는 주의 형상을 보존 유지시키십니다. 그리고 선하고 순수하게 살려는 그 자녀들의 마음을 유지시키십니다.온갖 어려움이 많고 혼돈스러운 세상에서 하나님은 모든 선한 것을 유지시키십니다.
셋째, 안내하는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우리 삶을 안내하고 가리키는 손입니다. 성도들이 어떤 갈림길에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방황 활 때, 하나님은 능력의 손을 펴서 당신의 자녀들이 가야 할 방향을 친절히 가르치십니다. 예)다니엘 5장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은 세상의 일을 가르치시는데 하나님 백성의 길은 더하다.
넷째, 하나님의 손은 우리에게 도 응징하는 손입니다. 사람이 사랑하는 자녀에게 매를 들듯이 그의 사랑하는 백성이 잘못되어 갈 때 사랑의 징계를 내리십니다. 우리가 예수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로는 율법이나 공의에 대한 벌이 아니라 사라의 훈계로써 벌하십니다.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강력한 사랑안에 있습니다. 부모가 고난 중에 있는 사랑하는 자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듯 그리고 그의 자녀가 성장하기까지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듯, 그리고 그의 자녀가 잘못된 길로 빠져 들어 가려 할 때 그에게 사랑의 매질을 하듯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 곁에서 늘 우리의 손을 잡고 이끄십니다.
18세기 구 독일의 프로이센 왕국의 대왕이었던 ‘프레드리히’가 하루는 공원을 거닐면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노인이 가슴을 쭉 펴고 천천히 위엄 있게 미소를 지으며 걷고 있었습니다. 대왕은 그 늠름함에 이끌려 그에게 다가가 “당신은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노인은 “나는 왕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깜짝 놀란 대왕은 대체 어느 나라의 왕자냐고 다시 물어보자 그 노인은 “나는 하늘나라의 왕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우리모두는 이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왕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화 ) 돈으로 살수 없는 것들.
April 14, 2024
본문: 시편 37:1-9,
마태복음 25:34-40
우리가 상상하는 것 보다도
본문: 로마서 8:18-28 4-14-2024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말하기를 성경 66권의 책을 요약해서 기록한 것이 로마서이며 그 로마서의 중심은 8장이라고 합니다.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이자 경건주의의 창시자이며, 후에 경건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었고, 또한 할레 대학의 창립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신학자 스페너(Philipp Jacob Spener)는 “성경이 가락지라면 로마서는 그 반지의 보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로마서는 성경의 핵심이 담겨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책입니다. 이렇게 로마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을 뚜렷이 배울 수 있는 아주 소중하면서도 심오한 내용을 담은 책입니다.
초기에 로마의 교회가 핍박을 당하고 있을 때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려 하지 않으려던 1명의 성도가 겨울에 로마 군병들에 의해 산 위로 끌려가 옷이 벗겨지며, 자기의 신앙을 부인하면 옷을 입혀주며 풀어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큰 소리로 “택함을 받은 열명의 그리스도의 군병, 주님을 위해 기꺼히 고난을 받으리”라고 외치며 찬양을 불렀습니다. 살을 애는 추위에 그들의 음성은 점점 작아지고 그 중의 몸이 얼어붙어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군병들 중 한 명이 자기의 옷을 모두 벗어 쓰러진 성도에게 입혀주고 자신이 대신 아홉명의 성도와 함께 찬양을 불렀습니다. 추위속에서도 신앙을 부인하지 아니하는 성도들의 영향을 받아 그도 역시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상상치 못할 현상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속에서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놀라운 사실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도에게는 고난이 필수적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사탄의 계략에 의해 성도에게 주어지며, 또 하나님에 의해 이 고난은 허락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고난이 없을 수 없습니다. 고난이 주는 쓰라림이 있지만, 또 그것이 주는 유익함 속에서 울고 웃으며 살아갑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인 우리가 이 세상 나그네 길을 가노라면 숱한 고난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어디서나 찾아오는 사탄의 위협과 진리를 좇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뜻밖의 질병과 재난으로 실의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바울과 같은 믿음의 선진도 고후 11:23-27에 보면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25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기서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믿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비록 현재의 고난이 크고 앞이 캄캄하지만 곧 구원이 다가온다는 약속의 말씀 앞에 우리는 쓰러지거나 낙담하지 않고 온갖 어려움도 참고 이겨낼 능력을 얻게 되니다.
셋째, 지금 우리가 가진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 보아도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없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고난에서 영광으로 가는 신앙인의 삶을 생각하며 우리 각자가 위로와 소망을 얻기를 원합니다.
요즘 기독교 방송에서 많이 나오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찬양의 제목은 ‘Made for more’라는 라는 찬양입니다. 그 가사를 조금 해석해 드리면,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십자가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나는 선택되었고 용서받고 자유로워졌습니다. 나에게는 미래가 있으며 그것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 왜냐면 난 무덤을 돌보라고 태어나지 않았으니까요.주님에 의해 나의 이름 불리워 졌어요. 거듭 나서 다시 살아나서 나는 더 많은 것을 위해 지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왜 부끄러운 마음에 누워 있어야 하겠는가? 은혜의 샘이 내 앞길로 흘러갈 때 나는 주님의 것임을 압니다. 그리고 난 더 많은 것을 위해 만들어졌어요.”
March 31, 2024
본문: 누가복음 24:1-10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들
서론: 오늘 부활 주일에 어둠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함께 찬양하며, 이 부활의 은혜가 우리 모든 성도와 가정에 임하기시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간악한 유대 병정에게 잡히시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로마 병정들에게 넘겨져 온갖 조롱과 고초를 겪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 형의 언도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친히 지고 오르셔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고 십자가에 매달릴 때까지 원래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사도 요한 제외하고 아무도 곁에 없었습니다. 3년을 동고동락했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도 두려워서 도망쳤고, 주를 가까이서 보좌했던 70명의 제자들도 다 주의 곁을 떠났습니다. 오직 예수의 어머니와 몇 연인들만 그 그분의 가까운 곳에 애타는 마음으로 머물렀습니다. 누가복음 23장에는 예수께서 Via Dolorosa(고난의 여정) 가실 때와 십자가에서 달리실 때 그분의 곁에 있던 5사람의 남자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본문에 등장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의 행적을 보면서 이 부활 주일에 함께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우리가 어떤 영화를 보면 그 작품에 나오는 주연과 조연의 인물들이 있고 악한 역할을 하는 배우와 과 선한 역할을 하는 배우가 있습니다 또 그리고 악인으로 나왔다가 마지막에 선한 인물로 변화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라는 실화 속에도 악한 역할을 하는 사람, 선한 역할을 하는 사람, 악인으로 나왔다고 후에 선한사람으로 변화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화 속에는 23장에 나오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골고다의 언덕을 오를 때의 구레네 시몬, 십자가 달리신 장소에 있었던 백부장, 예수님의 양편의 강도들, 그리고 끝까지 신의를 지킨 사도요한과 여인들, 그리고 숨을 거두신 후의 시신을 장례한 아리마대 요셉이 등장합니다.
4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하실 것을 믿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부활 전의 상황이 너무 고통스럽고 참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도 마지막 순간에 고통가운데 외치던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우리 주님은 절규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대부분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 차마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까지 그들은 고통 하며 절망과 슬픔의 시간을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영광을 맞이하기까지 어떤 자세로 우리의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할지 본문속의 사람들을 보면서 함께 상고하겠습니다.
먼저, 부활을 맞이하는 사람은 철저히 자신이 낮아지고 모든 것을 다 내려 놀 때 부활은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부활하시기전의 예수님 모습을 보십시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서 가 장 비참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로마의 가장 극악한 죄수가 받는 형벌이 십자가 형입니다. 이 형벌을 받기 전 예수님은 조롱당하고 멸시 받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부활의 영광을 누리려면 고통 슬픔 절망의 시간을 감내해야 합니다. 로마서 8:17,18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하십니다.
둘째, 영적 신앙이 부족할지라도 인간적 관계속에서의 신의와 도리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전의 23장에서 나오는 구레네 시몬을 보십시오. 그가 영적 신앙이 많아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을 함께 올랐을 까요? 성경의 앞뒤를 보면 그는 로마 군병이 억지로 시켰고, 그 또한 고통에 지쳐 쓰러진 예수님이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도 그 십자가를 지고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19:27에 보면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은 유일하게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가서 예수께서 어머니를 그에게 부탁하심을 받습니다. 그가 이때 성모 마리아와 함께 있었던 것은 그가 영적으로 훌륭해 서가 아니라. 그의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믿음이 그를 그곳으로 이끈 것이라 사려 됩니다. 요한의 글 중에는 “주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 말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시전 전까지는 영적으로 그는 많은 것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도 보면 교회에서 신앙이 어떠니, 교회가 영적으로 어떠하니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조그만 맞지 않으면 떠나갑니다. 그래도 몇 안 되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신의 와 도리를 지키는 사람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며 교회를 지킵니다. 예화) ‘쿼바디스 도미나이’에서 베드로는 이제 주님과의 신의를 지키러 로마성으로 다시 순교하러 들어갑니다.
셋째로, 어떤 상황 속에도 선을 말하고 하늘나라와 부활과 영생에 대한소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23장40-42에 나오는 예수님의 한편의 강도의 고백들을 잠시 보겠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행악자 임에도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미 보았다는 그 절체절명의 그는 선을 말했고 천국을 바라보았고 영원한 나라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백부장도 예수께서 숨을 거두신 후에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주십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 사람은 자신 실수 많고 결점이 많고 두려움 많지만 주님이 그들에게 친히 찾아오십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부활의 증인이 되는 사람은 그 자신이 영적으로 훌륭하지 못했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실망하고 두려워하고 낙심한 그들에게 우리 주님은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장이라고 말하는 고전 15:10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에게도 부족하고 연약하고 두려움 속에 있을지라도 부할 하신 주님이 오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주의 영으로 지금 이 곳에도 오셔서 함께 계십니다.
March 17, 2024
본문: 갈라디아 6:1-10
그리스도의 법칙
우리가 극단적 정통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레디(Haredi)’라 부릅니다. 기원전 1312년 시내산에 오른 모세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긴 다섯 권의 두루마리 경전 ‘토라’를 받았습니다. 이 토라에 근간을 두고 엄격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극단적인 정통파 유대교도가 ‘하레디(Haredi)’입니다. 하레디는 ‘두려움’ 혹은 ‘경외감’을 뜻하는 히브리어 ‘하레드(hared)’에서 유래했다. 자발적 실업상태에서 유대교 경전인 ‘토라’ 만을 공부하는 유대인들입니다. 극단적 정통 유대주의는 직계 친척이나 결혼한 사이가 아니면 남녀가 함께함으로 육체적 접촉도 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내에 이러한 극단적 유대주의자는 인구의 약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출산율은 이스라엘의 평균 출산율의 3배 이상인 5%선을 유지하고 있어, 50년 후에는 약 30% 정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들의 삶의 형태를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다섯권의 두루마리 경전인 ‘토라’를 바탕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세속주의로 빠진 정통파 유대교를 배척하고 있다. 남성들은 검은 모자에 흰 셔츠, 검정 바지 저고리 차림에 귀밑으로 돌돌 말린 양 갈래 머리 모양을 하고 있으며, 여성은 목과 팔다리, 머리를 가리는 복장을 한다. 이들은 레위기 19, 20장을 근거로 이런 전통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텔레비전, 인터넷, 라디오, 전화 사용을 금지하는 등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없으며, 중요한 소식은 동네 벽보를 통해 알리고 있다. 남성들은 율법 공부를 평생의 업으로 여기고 있으며, 토라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자발적 실업상태를 고수하고 있는 이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문제는 이스라엘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세속 성향의 일반 국민들과 소수를 이루고 있는 이들 하레디로 인해 이스라엘 내부적으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토라를 공부하며 폐쇄적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하레디’들에게 막대한 정부보조금과 병역의무 면제를 주고 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사회와 경제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하레디 유대인들은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자신들이 지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밝히지 않고 있어 이 갈등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오늘날 보수 기독교인들중에도 형식은 좀다르지만 이 유대인의 ‘하레디’처럼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가 명하신 법이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3300년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리신 유대인의 법을 지키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순절 기간동안 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종교수칙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속에는 그리스도가 약속한 성령에 속한 사람들이 가져야 할 법칙이 나옵니다. 이 법은 사람들 과의 관계속에서 적용되는 법입니다.
그 첫째가 인내입니다. 오늘 본문 전에 5:22,23는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이 성령의 열매들은 모두 인내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본문 서두에서 온유한 마음으로 형제의 잘못을 덮어주는 사람이 되라고 명하셨습니다. 9절에도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였습니다.
둘째, 너로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2절에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하였습니다. 6절에도 보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영혼한 생명과 하늘 나라를 우리와 나누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슬픔이 없고 영광만 있는 아름다운 천국을 나누기 위해 하나님 우편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 하늘나를 소개하시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천국에 이르게 하시려고 수난을 당하기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우리가 거쳐 할 곳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그곳을 나누어 주시려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나눌 때 자기가 먼저 쓰고 그것이 필요 없으면 나누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귀한 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법칙입니다.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에서 ‘선(칼로스)’은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예화) 엘링턴과 노 사관
셋째,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법칙입니다. 3,4절 말씀에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고 하십니다. 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만홀히(큑테르)’는 “코를 치켜올린다” 는 뜻이 있습니다. 2 절의 짐(바레)과 5절의 짐(포르티온)은 원어에서 좀의미가 다르다 ‘바레’는 한사람이 지기엔 무거운 짐을 가리키며, ‘포르티온’은 한사람이 질 수 있을 정도의 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의 법칙을 준수해야 합니다. 10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착한(아가톤) 일”9절의 ‘선’과는 다른 낱말이다. ‘아가톤’은 신적인 사랑과 희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가정들에게’ 믿음의 권속, 같은 철학의 권속, 지리적 권속등 세상의 모든 권속들을 말하는 것이다.
March 10, 2024
본문: 이사야 44:1-7,
요한복음 20:26-29
하나님과의 대화
오늘은 사순절의 4째 주일입니다. 구약 신학자 중 한명인 ‘발터 아히로트’는 구약성서 중심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상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계약사상’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두 대상과의 이루어지는 관계서는 언약 또는 계약이 서로 간에 이루어 진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도 신인 간의 언약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구약의 사상 위에 하나를 더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끈임 없는 관계 회복의 시도가 구약속의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언약을 떠나 하나님과 멀어져가는 상태에 있으면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 하시고 다시 소통을 하려 여러가지 배려를 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와 다시 대화(communication)를 하시려 한다는 사실들이 구약성경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 기간동안 우리가 중점을 두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신앙의 회복과 성장을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합니다. 정기적인 기도와 말씀 묵상, 좋은 설교와 찬양을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 영적 신앙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시기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생각하거나 일방적 소통관계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15: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 기간 동안 대화의 수도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도와 묵상으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우리의 친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야훼’ ‘엘로힘’ 그리고 ‘에샤다이’등으로 표기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것도 너무 위대하고 두려운 망극한 이름이어서 직접 부르거나 쓰지 못해서 ‘아도나이’ 즉 ‘주’라는 부르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신약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우리 아버지’고 부르게 가르치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수룬’이라는 말의 뜻은 의로운 자, 올바른 자라는 뜻입니다.
둘째,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기도와 묵상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 20:28에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고 하였습니다. 이 도마의 고백은 개인적인 면으로 볼 때 베드로의 예수님을 고백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다” 더 의미 있는 고백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넙고 궁극적인 고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는 메시아이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라고 고백했습니다. 도마의 고백은 나의 삶의 전체를 주관하시는 내가 순종하고 따라야 할 나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고백이며, 내가 찾았던 하나님 내가 영원히 의지해야 할 체험적 신이라는 고백입니다.
셋째, 주님과의 대화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상은 우리속의 평안입니다. 요한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첫번째 하시는 말씀이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찌어다.” 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구하는 기도를 했을 때 그것이 응답됨을 아는 것은 그 사람의 평안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배 드리는 것, 기도하는 것,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과 대화 형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일방적인 독백이나 외침이 아니라 그분과 세미한 음성으로 대화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뒤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로 갔고, 거기서 3년 동안 체류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7절에서 그는 자신이 회심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고 분명히 진술합니다. 그러나 아라비아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거기서 조용히 칩거하면서 깊은 기도와 묵상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최근에 어느 주석학자는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모든 인간적인 접촉을 끊고 하나님과 홀로 시간을 보냈다고 말합니다. 행전 26: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March 3, 2024
본문: 빌립보서 2:1-11
내려 놓고 비우는 성도의 삶
얼마전 현대의 종교비평가가 말하기를 “유럽에서 신은 이미 떠났음을 느끼고, 미국에서 신은 지금 떠나고 있는것 같고, 한국에서 신은 지금 따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말은 지금 이곳과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만큼 영적으로 갈급하지 않다는 의미를 같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가 사순절의 3번째 주일인데, 많은 성도들은 이 기간 동안 그리스도의 고난을 되세기는 것만 생각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의 세속된 것을 내려놓는 훈련, 나를 비우는 훈련, 그리고 그리스도의 겸손은 익히는 그런 영성 훈련들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데도 어떻게 자신을 비우고 낮추셨는지를 발견하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자기 비하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 말씀 속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자신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과 야망과 소유욕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뜻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의 처음으로 해야 할 자세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제가 우리 한국의3.1절이었는데, 삼일운동에 주축이 된 33인과 동참자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꿈과 욕망을 나라를 위해 내려놓는 위인들이었다. 독립선언서는 기독교측 16인, 천도교측 15인, 불교측 2인 등 33인이 민족 대표로 서명하였습니다. 세상 나라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헌신한 이들을 보면서 영원한나라를 위해사는 우리가 이세상에서의 욕망과 소유욕을 내려놓고 하늘의 소망을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잠수 안경을 쓰고 물 속에 들어가야 바다속의 아름 다움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잠수 훈련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순간이 호흡을 자기가 착용한 가글과 튜브를 신뢰하고 바다속에 들어가 숨을 쉬는 순간인 것을 제가 알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의 은혜의 바다속에 들어가 주의 놀라운 세계를 경험하려면 세상적 관념을 버리고 일단 주의 은혜의 물결속으로 뛰어 들어야 합니다.
둘째, 나를 비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본문 5절에서 ‘자신을 비워’ 라는 의미는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19세기 ‘케노시스설’처럼 신성을 버리고 인성을 지니셨다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신학자 빈센트의 주장에 의하면 자신을 비웠다는 의미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본문 6절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라고 하였습니다. 원어에서 본체를 ‘모르파’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변할 수 없는 본체(Essential Form)를 말합니다. 7절의 형체를 뜻하는 ‘스케마’는 본체를 둔체 변화하는 ‘Form’말한다고 신학자 Lightfoot이 주장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런 근본체의 대우를 버리시고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비하하셨습니다. 어떤 분이 성 어거스틴에게 “신앙의 첫째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그것은 겸손이요” 대답했습니다. “두번째와 세번째는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그것도 다 겸손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셋째, 다른 이가 자기에게 무엇을 주기를 바라지 말고 자기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라. 자기의 소유를 나누는 것보다 자기의 봉사와 재능을 기부하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선행을 배풀 때 나의 제정적 능력을 생각 합니다. 소유한 것이 많지 않아도 내가 가진 것 들 즉, 재능, 나의 인격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는 등의 얼마든지 봉사와 선을 베풀 수 있습니다.
끝으로, 참된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후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인간의 삶을 4단계로 단정해 생로병사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인간의 삶의 종점을 죽음으로 묘사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죽음 이후를 줌심으로 생각합니다.
February 25, 2024
본문: 에베소서 3:1-9
그리스도인의 비밀
이번주는 사순절의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올해는 사순절 기간이 좀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원래 교회사에서 부활 주일을 정할 때 춘분이 지나고 만월에서 제일 가까운 주일을 부활 주일로 정합니다. 사실 부활주일은 유대인들의 월력과도 좀 연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정할 때 춘분이 지나고 만월에서 제일 가까운 토요일로 유월절을 제정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유월절 전날에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도 유월절 다음날을 부활절로 정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비밀’이라는 단어가 50여회 나오는데, 신약에만 33회나옵니다. 오늘 본문이 나오는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 6회씩 나옵니다. 한 장에 3번씩이나 나오는 장은 오늘 본문의 3장과 골로새서 1장입니다. 구약에는 ‘흐히다’라는 히브리말로 나오는데 이는 ‘가려진 수수께끼’라는 의미이다. 또한 단어 ‘미쓰타르’란 말로 에레미야서에 나오는데, ‘덮어 감추어졌다’는 의미이다. 이는 헬라어 ‘미스테리온’ 영어의 ‘미스터리’란 말과 유사하다. 신약에는 헬라어 한 단어 ‘뮈스태리온’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입을 다물다’란 동사 ‘뮈오’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순절기간 동안 우리는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비밀을 묵상해 보아야 하는데, 우리 하나님과 그의 아들 안에는 어떤 비밀이 있을까요? 오늘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발견해야 할 주님안에서의 비밀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려 합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신 신비한 비밀이 있습니다. (1,3절) 이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개개인을 사랑하시고 그분의 자녀 삼아 주신 참으로 신비로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방인이 우리를 부르시고 사랑의 자녀 되게 하신 사실이 정말 신비스럽습니다.
둘째, 예수그리스도 안에는 놀라운 비밀들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한국의 유명한 기독교 여류시인 송명희 씨가 쓴 ‘예수 그 이름’이란 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찬양으로 더 많이 알려진 시입니다. 하늘의 시인이라 불리는 송명희씨는 뇌성마비로 태어났습니다. 의사가 태중의 아기 머리를 집게로 잘못 건드려 소뇌가 손상되어 뇌성마비가 된 것입니다. 열 살이 넘어서야 스스로 숟가락질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가정은 말할 수 없이 가난했고 아버지는 결핵으로 시달렸습니다. 지난 시절 하나님과 부모님을 많이 원망도 하였습니다. 17세가 되던 해 죽더라도 하나님을 만나고 죽겠다고 목숨을 걸고 기도하는 가운데 "내가 너를 버리지 않겠노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약 4년간 하루 5시간씩 기도하며 성경 삼십여번 통독으로 주님의 지도하심을 받아 시를 기록하게 되었고, 1985년 5월 시집 두권과 한권의 간증 수기를 출간하고 동시에 송명희 작사 최덕신 작곡 주 찬양1집 '그 이름'이 발표되었습니다. 지금은 현대적인 음색과 세련된 편곡으로 리메이크된 신곡들이 있지만 거의 2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처음 이 시를 읽으면 전해오는 영적 심오함이 느껴집니다.
셋째, 때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침묵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나온 ‘비밀’이라는 헬라어 원문의 의미를 찾아보니, “종교의식속에서 초대되어 부과되는 침묵의 개념”이라고 해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묵상하며 영적으로 심오한 은혜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한자로 ‘정중동’이라 하는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은혜입니다. 주의 말씀과 은혜를 되새기는 고요함 속에 물밀 듯 밀려오는 감격스러운 은혜의 물결속에서 나의 영혼이 갖는 기쁨과 평안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습니다. 무슨 환상을 보거나 신적 계시를 받지 않아도 주의 사랑을 이런 침묵속에서 깊이 체험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또 바울 선생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발견한 비밀은 고난속에서 더욱 깊이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서두에 성경에서 ‘비밀’이라는 단어가 바울의 옥중 서신인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고 했습니다. 서도바울은 고난과 핍박속에서 ‘앤 크리스도’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리를 그리고 주 안에 숨겨진 ‘비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본서에 만 ‘그리스도 안에’란 단어를 30회 이상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라틴어의 ‘비아 돌로로사(고난의 길)’ 속에서 철저하게 침묵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그리스도안에 있는 비밀을 간직하였기에 고난과 핍박속에서 침묵할수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주님안에 감추어진 비밀은 우리가 보화를 캐내는 작업을 하듯이 우리 스스로 한 단계씩 찾아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스스로 도전하고 그것들을 찾아가는 영적 devotion과 discipline이 있어야 합니다. 언제부터 인가 우리 한국 교회에는 신앙의 성숙도 단시간에 결말을 얻으려고 하는 관습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라톤 경주 같은 영적 경주를 하고 있습니다.
February 17, 2024
본문: 느헤미아 1:3-11
한 시대속의 그리스도인
내일은 미국의 휴일인 President Day 입니다. 연방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워싱턴 탄생일인 Presidents' Day는 1968년부터2월 셋째 월요일에 기념되는 미국의 공휴일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모든 이들을 기리기 위해 기념하는 날이 많으며, 1879년부터 미국 독립 전쟁에서 대륙군을 승리로 이끈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을 기리는 연방 공휴일로 지켰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Washington은1787년에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 President Day는 대부분의 주에서 1968년부터 공식 공휴일로 지키게 되었으며, 명칭은 ‘워싱턴 탄생일’불리웠다가 후에 지난 주 2월 12일에 있었던 링컨 대통령의 생일과 합하여 ‘대통령의 날’로 불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BC 441년경 바사의 왕 아닥사스다의 통치하에서 왕의 신망을 받았던 유다인 느헤미야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른의 뜻은 ‘여호와의 위로’라는의미입니다 그가 남은 포로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을 제건하고 율법과 언약을 다시 새운 이야기이다. 그를 바사제국의 귀한 대신으로 세우셨던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와서 성벽을 제건 할 때 산발랏이라는 사마리아 총독과 동쪽의 암몬 총독 도비야의 거센 반발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성령이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한 시대를 사는 주의 성도가 어떤 마음가짐과 또한 주의 자녀 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먼저, 그는 자기가 하는 일 속에서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섭리를 찾는 사람이었습니다.(2:12,7:5). 그는 자기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둘째, 그는 마음이 순수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국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바사 왕 앞에서도 감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가 고국에 대한 안타까움에 수심이 가득하여 왕이 이상히 여길 정도였습니다. (2:2)
셋째,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는 그의 삶에 필수적이며 자연스러운 요소입니다.
넷째, 그는 열정적 사람으로 몸소 삶에 본을 보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타인들도 그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감동을 주었습니다. 백성들이 낙심하고 절망하면 하나님께 도움을 받도록 인도했다.
다섯째, 그는 사회를 일깨워 백성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는 온갖 열정을 쏟아서 죽어가던 예루살렘의 유다 사회에 생명과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폐허 상태였던 예루살렘의 거리를 새로 건축. 학사였던 학개, 에스라와 함께 백성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9:1,2.6)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2)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6)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February 11, 2024
본문: 요한 계시록 3:14-21
주님께 칭찬받는 교회
이번 주와 다음 주는 Bay area와 세계적으로 여러 중요한 Event 가 있는 주간입니다. 어제는 저희 한국과 동 아시아에서 가장 큰 명절 중에 하나인 음력 설날을 지킵니다. 또 오늘은 미국의 가장 큰 sports행사중에 하나인 Super bowl 이 있는 날입니다. 특별히 이곳을 연고로 하는 49ers Football team이 수퍼 볼에 올라가 정말 모든 사람들이 들떠서 경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 다음주 화요일은 전세계의 남자들이 긴장하는 Vallentine’s day입니다. 오늘 미국에서만 11million 이상의 사람들이 Super Bowl을 볼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리고 이지역의 49ers fan들중 만 불 가까이 되는 입장권을 구입에서 라스베가스에 가서 게임을 직접 보려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지역에는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근래에는 아무리 멀어도 비행기를 타고 원정 경기를 보러가는 가는 열정적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속에 나오는 라오디게아에 사는 사람들은 오늘날 베이지역에 사는 사람처럼 부유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라오디게아는 수리아 왕 안티오쿠스 2세(주전 262-246년)가 아내 라오디케의 이름을 따서 건설한 도시이다. 실크로드의 거점 도시로 상업과 은행업이 번창했고, 기름진 땅 때문에 목축업과 농업도 발달해 일곱 교회의 도시 중 가장 번영한 곳이었다. 로마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주후 13년과 61년의 대지진으로 도시가 완전히 파괴됐을 때에도 로마의 지원 없이 자력으로 완전하게 복구할 정도였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스스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랑할 정도였다(계 3:17). 이 도시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지만, 다른 도시들과 달리 초대교회 성도들과 충돌한 기록이 없다. 유대교나 초대교회 모두 물질적 풍요에 빠져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라오디게아에 단 하나 부족한 것은 물이었다. 특별한 수원이 없어 북서쪽으로 9km 떨어진 히에라볼리의 온천수와 북동쪽 14km 거리의 골로새에서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물을 수로로 끌어와 사용했습니다. 이 물은 수로를 통해 오는 동안 미지근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석회와 뒤섞여 텁텁하고 메스꺼웠다. 라오디게아에서 발굴되는 파이프가 모두 적갈색으로 변색된 것을 보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로마의 문헌에도 라오디게아의 미지근한 물을 역겹다고 표현하는 내용이 자주 발견된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그 지역의 물에 비유해 ‘미지근하여 덥지도, 차지도 않으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말씀하셨다. 라오디게아는 주의 일을 향한 뜨거운 열망과 헌신이 없었습니다.
물이 안 좋은 라오디게아에는 눈병, 귓병이 많았다.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안약과 귀에 쓰는 약을 개발했고, 의과대학까지 설립했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는 부유하지만, 영적으로는 빈곤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영적인 금을 사고, 흰옷을 입어 수치를 가리며, 영적인 안약을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 한마디 없이 책망과 권면만 받았다. 그러나 이 책망과 권면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사랑하셔서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잠 6:23, 25:12, 전 7:5)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7교회에 보내는 교회 중 책망을 받지않는 교회는 빌라델피아 교회뿐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과 칭찬과 약속을 받는 교회였습니다.
먼저 그들이 받은 책망은 신앙이 덥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했다는 것이다. 예) 미국 남북 전쟁때의 한 병사.
둘째, 주의 권면은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문을 열어 받아드리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해야 한다.
셋째, 주의 약속은 주께서 어디에나 동행하시며 장차 주의 보좌에 앉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을 때 영국의 한 문인이 나무판을 끌어안고 파도와 매서운 추위와 싸우며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추위와 탈진으로 이제는 손가락에 힘마저 사라져 판을 놓고 생명을 포기하려는 안타까운 순간이 왔습니다. 그 때에 하늘에 1인승 비행기 한 대가 빙글빙글 돌며 이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사라져 갔습니다. 순간 그의 손가락에 다시 힘이 들어갔고 놓아 버리려던 나무판을 힘껏 끌어 않은 채 반나절을 더 버티었습니다. 마침내 구조선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분명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탈진한 상태였습니다. 살기를 포기하려는 절망적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무판을 붙들고 반나절 이상 더 버틸 수 있는 힘이 갑자기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누군가가 자신을 보았기에 살 수 있다는 소망이 힘이었습니다.
결론: 라오디게아 교회는 종교개혁 이후 성경으로 돌아가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오늘날의 교회 시대를 상징한다. 현대의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물질적, 기술적, 이성적으로 탁월한 수준이다. 세상의 박해와 핍박도 없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가 보여 주듯 현대 교회의 가장 무서운 적은 미지근함과 영적 무지이다. 우리는 때로는 뜨겁게, 때로는 시원한 얼음 냉수처럼 충성함으로 영적인 부요를 누려야 한다. 더 나아가 영적인 눈을 열고 일곱 가지 모습으로 자신을 밝히신 주님을 알아보며,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그곳에 계신다), ‘임마누엘’ 로 계시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새 예루살렘 성의 완성에 도착해야 할 것입니다.
February 4, 2024
본문: 마태복음 5:14-20
무엇을 전하는가?
요즘 한국에서 기독교인의 무리를 지칭하는 단어 중에서 ‘가나안 교인’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나안 교인’이라는 용어는 성경의 나오는 지명인 '가나안'을 거꾸로 하면 '안나가'라는 문자이며 어떤 특정한 곳에 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가나안' 교인이란 교회에 나가지 않지만 자신은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교인이란 교회를 출석하는 성도인데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에게 교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미 미국에서는 'Believing without Belonging (소속이 없는 신앙)' 혹은 'unchurched Christian (교회가 없는 크리스천)'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명목상 기독교인들이다. 작년 2023년 우리나라 개신교인이 전체 인구의 15%까지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국내 개신교인은 지난 2012년 22.1%였다가 2017년 19.6%으로 떨어졌고 6년이 지난 현재 15%까지 계속 감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같은 결과는 한국기독교목회자 협의회가 지앤컴 리서치와 목회데이터연구소에 의뢰해 조사한 제5차 한국기독교 분석리포트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신앙의식 조사’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만 19세 이상 개신교인 2,000명, 비 개신교인 1,000명, 목회자 802명, 일반인 9,182명등 총 1만 2,984명을 대상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조사했습니다. 이번 조사에서 우리나라 총인구 5,134만 명 중 개신교인을 15%로 보면 개신교인은 약 771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와 더불어 가나안 교인은 2017년 23.3%에서 2023년 29.3%로 6년간 6%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회출석자 70.7%, 가나안 성도 29.3%를 고려하면 현재 교회출석자는 545만 명, 가나안 성도는 226만 명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 같은 주요 종교인구의 감소는 우리나라의 무종교인 비율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만 19세 이상 국민 9,182명을 대상으로 대면 면접 방식을 사용해 ‘종교 여부’와 ‘믿는 종교’를 조사한 결과, 현재 종교인은 36.6%, 무종교인은 63.4%로, 2012년 이후 종교인의 비율이 추락하고 있으며 2017년 무종교 인구가 종교인구를 역전했으며 지난해 격차가 더욱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특이 할만한 사실은 한국의 기독교인 들이 동양에서 성지순례를 가장 많이 간다는 사실입니다. 교인들은 줄었는데 돈 들여서 사는 성지 순례는 왜 이렇게 많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세에 기독교가 타락했을 때 성지 순례를 가장 많이 갔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물론 성지순례를 가서 오병이어의 현장인 벳세이다 들녘에서는 산들거리는 바람 속에서 주님께서 사역하셨던 온기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초원에서 조용히 묵상을 한다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찌된 일인지 많은 기독교 순례자들, 특히 목회자 단체들조차도 오병이어 기념교회는 순례를 하지만 근처에 있는 벳세다 들녘은 찾지를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 이유는 성지순례의 잘못 설정된 성지순례 개념과 값싼 여행경비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무의미 하고 실패했다고 하는 기독교인 들의 원정은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7차에 걸쳐 이루어 진 십자군 원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의 중심은 1,2세기에 한 번씩 이동해왔습니다. 그러나 요즘 참된 기독교인이 감소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빛은 어떤 것이며 그 빛을 받은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앞절에서 언급한 소금은 자신을 녹여 부패를 막는 역할을 하지만 빛은 많은 사람과 사물에게 비추어 세상을 밝히는 것이다. 요일 1:5에 “하나님은 빛이시요” 라고 하셨고 예수그리스도도 빛이라고 요한8:12에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창조의 의미이며, 생명의 의미인 하나님의 빛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빛으로 born again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본문에서 신자 또한 빛이라 하셨다. 요한1:8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빛을 받아서 세상에 비추는 반사체의 빛이라 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빛은 성도의 지혜를 의미합니다. 요즘 성도가 성령의 역사도 있고 능력도 있는데,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성령과 성경으로부터 오는 지혜의 실천입니다.
이제는 세상에서 빛의 역할 작용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빛은 광선이 되어 어두운 곳에 비추어 모든 것을 밝게 합니다. 우리 성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첫번째 사명이 우리가 가진 빛을 밝혀 어두운 곳을 밝게 하는 일입니다.
둘째, 빛은 열이 있어 모든 곳에 온기를 주고 얼어붙은 곳에 해빙을 가져다 줍니다. 길은 길은 험하고 비바람 거세도 두 연인이 눈 보라 속에도 두 손목을 꼭 잡고 서로를 위하면 따스한 온기를 나눌 수있다고 하는 어떤 노래 가 있습니다.
셋째, 빛은 살균성이 있습니다. 모든 박테리아나 세균은 햇빛을 받을 때 사라집니다. 옛날 한국에서 결핵군이 성행할 때 요양원에서는 틈나면 이불과 옷 가지들을 햇빛에 널었다고 합니다.
넷째, 빛은 결실의 작용을 합니다. 식물은 햇빛을 받았을 때 줄기가 성장하고 파란 잎을 만듭니다. 과일과 곡식은 햇빛을 받아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B.C3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대낮에도 등불을 키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너무 어둡고 정직한 사람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가 받은 주님의 빛은 맑고 깨끗하고 순수한 빛입니다. 이 시대는 이기, 시기, 질투, 교만이 성행하는 때입니다. 원래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순수하고 정결한 빛을 세상에 비추십시다.
January 28, 2024
본문: 이사야 63:7-14
우리 인생의 발자국
여러분은 ‘모래위의 발자국’ 이란 시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 시의 원저자는 ‘마가렛 피쉬백 파워즈’라고할수 있습니다. 이시는 Mary Stevenson, Margaret Fishback Powers, and Carolyn Joyce Carty를 비롯한 12명의 사람들이 저작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는 그녀의 삶과 전해지는 자료를 살펴볼 때 ‘마가렛 파워즈’일 가능성이 제일 높습니다. 그녀의 삶 속에서 어떻게 이 시가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는 1964년 저자의 남편이 저자에게 청혼을 한 이후 호숫가에서 산책을 즐길 때를 회상하며 쓴 내용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해변가를 걷던 중 파도에 밀려 한 사람의 발자국이 사라지고 다른 한 사람의 발자국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저자는 자신들의 꿈도 발자국이 물에 씻겨 없어지듯 사라질 것이라 걱정했다. 그러나 남편인 폴은 자신들의 희망찬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이라며 선명하게 남아 있는 발자국을 가리켰다. 그리고 “만일 우리 둘이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이 찾아온다면 주님이 우리를 안고 가실 거예요. 우리가 신앙을 잃지 않고 그분을 신뢰하기만 한다면 말이오.”라며 그녀를 격려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는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 저쪽으로 자신의 지나온 날들이 비쳤습니다. 한 장면씩 지나갈 때마다 그는 모래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난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그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비쳤을 때 그는 모래 위의 발자국을 모두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발자국이 한 쌍밖에 없을 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바로 그의 삶에 있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들이었습니다. 그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언제나 저와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 어려운 시기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없습니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시간에 주님께서 왜 저와 함께 하지 않으셨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버리지 않는 단다. 네 시련의 시기에 한 사람의 발자국만 보이는 것은 바로 내가 너를 업고 갔기 때문이란다.”는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마가렛 피쉬백 파워즈가 한 말 중에서 “인생의 시련은 사람을 더욱 더 성숙하게 하는 과정이다.” 라는 명언이 있고, 또 그녀의 남편인 폴 피쉬백 파워즈가 한 말중에서 “아픈 기억과 실수에 늘 끌려 다니거나 얽매이지 말고 그것을 오히려 도약의 기회로 활용해야 합니다.” 와 “하나님은 가족들이 ‘바쁨’이라고 이름하는 황폐한 섬에 ‘난파’당하거나 자녀들이 학대받고 소홀히 여겨지는 것을 금하셨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라는 명언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발자국을 돌이켜 보면 우리 주님이 도우셨던 여러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낭독한 본문을 통해 보면 5가지의 주님이 도우신 역사의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를 선택하여 주신 흔적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7,8절에 보면 자녀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시며 긍휼과 자비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창세기에서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과 그 가족은 하나님이 부르시기 전 실로 미비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보고 선택하여 오늘 까지 유대뿐 아니라 세계의 그리스도인이 우러러 보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 하나님이 오래 전에 선택해 주신 귀한 존재들 입니다.
둘째, 우리를 인정해 주시는 은총입니다. 8절에 보니 “거짓을 행치 않는 그의 자녀”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의 백성이 거짓을 전혀 행치 않아서가 아니라, 죄를 범하더라도 순수하고 겸손하게 주 앞에 다시 나와 참회하고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는 모습을 주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인정해 주시고 우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이 전혀 실수를 않해서가 아니라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주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며 인정해 주셨습니다.
셋째, 우리와 함께 하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9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백성이 위기 당할 때마다 주의 사자로 천사로 함께하시고, 광야에선 불과 기름기둥으로, 장막에 친히 임재하심으로, 그리고 사사시대는 성령으로, 왕정시대에는 성전에 좌정하심으로 택한 백성들의 실제 삶에 동행하셨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징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0절에 보니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백성이 주를 반역할 때 징계 그들을 채찍으로 징계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발자취에서 좋은 것만 있을 것으로 착각하시만 그의 자녀이기에 징계로서 바로잡기도 한 흔적으로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예화) 치악산 계곡
마지막으로 주님이 친히 인도하셨던 흔적입니다. 앞의 ‘모래위의 발자국처럼 우리 주님을 친히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가 지쳐 쓰러지면 친히 엎고 우리를 인도 하십니다. 신명기31:6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어떤 부인이1989년 갑작스러운 사고로 딸이 물에 빠지고, 이를 지켜보던 남편은 그 충격으로 심장마비를 당해 죽음의 위기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 그 사고 현장에는 파업으로 병원에 출근하지 않고 물놀이를 나온 간호사가 있었는데 익사 사고 전문 간호사와 심장마비 치료 전문 간호사였습니다. 남편과 딸 모두 생명에 지장이 없어 중환자실에서 회복을 기다리고 있는 중에 간호사 한 명이 남편을 위해 기도도 해주며 어느 무명 그리스도인의 시 한 편을 읽어주었는데, 바로 ‘모래 위의 발자국’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는 우리의 삶의 발자국을 돌이켜 보면 늘 주님이 나를 부르셨고 구원하셨고 늘 동행하신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와 나의 남긴 발자국을 보며 위로와 평안과 소망을 얻고 또 주와 함께 걷는 발자국을 남기기 위해 애쓰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January 21, 2024
본문: 열왕기상18:36-46
응답되는 우리의 기도
구약 성서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는 두 사람이 있는데, 창세기에 나오는 ‘에녹’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 입니다. ‘엘리야’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의 이름 뜻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엘리야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드린 후에 하나님이 오묘하고 신기하게 응답해 주시면 우리는 “하나님은 정말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 고백합니다.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선 반드시 살아계신 주님과의 인격적 교제와 함께 그 분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단호히 던져버려야 한다. 엘리야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땅이 우상숭배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기도한 즉 제단 위 불이 떨어진 것과 또한 흉년이 든 때에 큰 비를 내리게 한 사건은 그 자신이 여호와께 인정받는 신실한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행적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이교의 우상 바알과 아세라 숭배자들과의 대결에 있었습니다. 갈멜산 위에서 참다운 신의 증거를 구하면서 바알에 도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신을 선택할 것인지 결단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가뭄이 선포된 지 삼 년째 되는 해, 하나님께서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이스라엘에 다시 비를 내리시기 위해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십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상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수백 명의 거짓 선지자들과의 마지막 단판승부를 벌였습니다. 대승한 그는 우상숭배자들을 기손 강가로 끌고 가 모두 처형했습니다. 아합은 자신의 추종자들이 살육되는 현장을 목도했습니다. 사실, 그도 자기가 엘리야에게 행했던 모욕과 저주를 돌이키면서 전전긍긍했는데 의외로 선지자는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18:41)라고 외치는 게 아닌가. 엘리야는 아합의 삶의 방식 대로 우선 행하게 해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2가지의 중요한 기도에 대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3년이상의 가뭄속에서도 불이 먼저 내리게 하였고 그리고 가뭄 속에 기다리던 비를 내리게 하였습니다. 성도가 응답 받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선 먼저 성령의 불이 먼저 내리고 그리고 정결하게 우리의 죄를 씻는 물이 내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말씀을 통해 엘리야의 능력 있는 기도는 어떤 성격이었습니까? 첫째, 엘리야는 군중들로부터 떨어져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마 6:6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 일은 물리적 고립 이상을 의미한다. 부연하면 우리가 거룩하신 분께 가까이 나아가 조용히 말씀을 아뢸 수 있도록 우리의 ‘영’을 고요하게 하며 ‘육’을 진정시키는 동시에 ‘혼’을 집중시키는 일입니다.
둘째, 엘리야가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18:42)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수 시간 전 그는 바알 세력에 직면해 바산의 참나무처럼 강했으나 이젠 여린 풀잎처럼 머리를 수그리고 있습니다. 지존하신 분에 대한 경외심과 함께 자신이 진토와 같은 무가치한 존재임을 행동으로써 고백한것입니다. 모세가 불타는 가시덤불 앞에서 신발 끈을 풀어야 했듯 우리도 그 분의 임재 앞에 서서 두렵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의 향을 올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셋째, 엘리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한다. 성경엔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왕상 18:1) 대개 우리는 주님이 그것을 지키실 터인데 굳이 기도할 필요가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에스겔은 유다의 회복을 위한 축복의 언약을 선포한 후에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뤄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 36:37)고 가르칩니다. 엘리야는 믿음으로 큰 비의 소리를 들었음에도 그것을 위해 계속 기도했습니다.
넷째, 엘리야는 기도하면서 인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도의 응답 여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18:43) 하늘에도, 바다에서도 비가 올 것을 알려주는 조짐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 우리의 반응은 어떠할까. 한 마디로 ‘끝났네!’ 아닌가? 엘리야도 즉시 응답을 받지 못했는데 우리가 당장 응답받기를 원한다면 지나친 과욕이다. 족장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천사와 씨름하다가 환도뼈가 위골되었지만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라고 말한 것을 명심하자.
끝으로, 엘리야의 기도는 그가 구하지도 않은 강건의 능력까지 받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즈음 아합은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향했습니다. 다른 한편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18:46) 그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처럼 믿음의 기도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여기서 보면 엘리야가 허리를 동이고 신속하게 달려가는 장면은 우리에겐 성령의 도우심으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는 성도뜻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3년이상의 가뭄속에서도 불이 먼저 내리게 하였고 그리고 가뭄 속에 기다리던 비를 내리게 하였습니다. 성도가 응답받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선 먼저 성령의 불이 먼저 내리고 그리고 정결하게 우리의 죄를 씻는 물이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때 그분의 영광과 나라를 위한 기도는 바로 응답하시는데 먼저 성령의 불로 우리를 변화시킨 후에 확실하게 응답하십니다. 또한 우리 삶속에서 필요한 것을 기도를 응답하실 때는 엘리야와 그의 사환의 순종을 보시고 비를 단계적으로 내리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보시며 점진적으로 그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속에서 드렸던 기도가 세월이 지나 응답되었던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3: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January 14, 2024
본문: 요한복음 1:19-28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우리 기독교인들을 우리 인생은 광야와 같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 순전히 광야에서만 살다가 짧은 인생을 마감한 선지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마태11:7-9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또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세례 요한의 삶에 대하여 살펴보려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로부터 보냄을 받은 세례 요한의 사명을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첫째, 그는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요한1:7,8에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로 하였습니다. 신학자 Vincent는 요한복음 전편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7가지의 증거가 흐르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성부 하나님의 증거, 그리스도 자신의 증거 , 그의 하신 일의 증거, 성경의 증거, 선구자 요한의 증거, 제자의 증거,성령의 증거입니다. 참 빛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것은 오늘날 성도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던 다 그리스도를 증거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제일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사실은 ‘그리스도를 증거’함에서 성취됩니다.
둘째,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사40:3)을 인용한 것입니다. 자기를 인격(person)이라 하지 않고 소리(voice)라고 하였는데 요한의 겸손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임할 때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결코 메시아가 아니고 그를 준비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답변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유념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는 말이 소리인데, 여러분, 소리는 한번 밖으로 나오면 그것을 다시 거두어 드릴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고 그 나라의 영적 리더 급인 대 제사장들 레위인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들에게 나아와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신앙상담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사람들은 그곳을 빠져나가 거꾸로 광야로 갔습니다. 그곳에 세례 요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세리들도 있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당시 용병으로 징집되었던 포악한 군인들까지도 그에게 나아가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다 나오는 것인데, 그가 산 곳은 광야, 빈들이고, 그가 입은 옷은 낙타 털옷이고, 그가 먹고 산 것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의 식량은 빵이 아니라 메뚜기와 석청이었다는 말에서 그의 삶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사람 살 곳이 아니고, 빈들에선 먹을 것이 없습니다. 오르지 있는 것은 하이에나 같은 짐승들과 곤충류와 뱀 같은 파충류 들 뿐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 사는 곳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가 그의 거친 음식으로, 홀로 살았다는 결론입니다. 그 점이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여야 하는지 깨달았을 것이라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사명을 가졌습니다.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할 때 광야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메시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신었던 신발은 주로 가죽으로 만들어진 끈이 있는 샌들입니다. 유대 사회 풍습은 손님이 방문하면 종이 손님의 신발 끝을 풀고 신을 벗기고 발을 씻기는 관례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그리스도와 비교할 때 그런 비천한 종의 자격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비하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리스도와는 대조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천박하지만 그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라는 직분을 갖고 있기에 그처럼 영광스러운 일도 없다는 선포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될 까봐서 일 것입니다. 단 한가지라도 분산되는 것을 막고 오르지 주님께 집중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이 다 예수께 가는 것을 보고 요한복음 3:30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라고 말하였습니다.
끝으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아무도 없는 외로운 시간을 통해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독대를 통해서 그 사명과 그것을 행할 능력까지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간혹 홀로 있는 시간들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 현재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언제 이 세상을 떠날까? 이 땅에서 나는 무엇을 하다 가야 할 것인가? 다른 사람이 건네준 믿음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 믿음으로 과연 천국을 갈 수 있을 것인가? 더 늦기 전에 우리도 그런 질문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고민하며 찾고 또 찾아야 할 것입니다. 고민한 것만큼 우리를 알게 되고 성찰하는 것만큼 우리 삶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이 center가 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center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드리는 찬양도 예배도 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January 7, 2024
본문: 이사야 43-1-7
이제 그리고 장차
어느 기독교 가정의 어린 아이가 요즘 엄마로부터 덧셈과 뺄셈을 이제 막 배우기 했습니다. 하루는 밤에 엄마와 같이 길을 걷다가 한 교회의 지붕에 세워진 십자가를 보며 “엄마 저기 하나님의 더하기 표시가 있네요” 라고 엄마한테 말했습니다. 엄마는 아직 아이에게 교회의 표징인 십자가에 대하여 아직 설명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저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달려 죽으신 십자가를 뜻한단다”라고 설명 해주고 문득 떠 오르는 것이 있어서 아이에게 “얘야 너의 말도 틀리지 않았단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는 여러가지를 더해 주신단다.”라고 하며 아이를 보며 웃었습니다.
기독교는 과거의 있었던 하나님에 대하여 그 사실들을 들었고, 우리는 지금 그하나님 믿으며 살고 있고, 또 장차 우리에게 무엇이 더하여 진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하셨던 사건들과 그분의 십자가의 사실들을 믿고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과거의 나에게 일어났던 사실들만 가지고 삶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 지금 어떻게 살며 어떻게 앞날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제’를 단어를 두번씩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이라는 말과 ‘이제’라는 단어가 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한국어로 ‘이제’라는 말은 ‘지금부터 앞으로”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지금 나는 어떤 신분으로 살며 앞으로 어떤 삶을 우리가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이사야서를 보면 40장부터는 이스라엘의 전체의 구원과 회복을 말하고 있고 오늘 43장에는 한 개인 들에대한 구원과 사랑을 표현하고있습니다. 읽은 본문저는 오는 그 옛날 이사야를 통해 주신 본문 말씀을 통해 새해 2024년을 맞이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부르셨고, 지금과 앞으로 우리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상고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를 창조 하셨고 조성하셨던 하나님은 우리를 그 자체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1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Calvin은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란 의미를 이것은 과거형으로 되어 있으나 미래까지도 언급하는 문장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애굽에서의 구원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장차 도래할 또 하나의 구원에 대한 희망과 아울러 예표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핬습니다. 1절 후반부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를 영어로 “Called you by name” 는 우리의 이름을 친히 불렀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하나님꼐서 그를 잘 아신다는것이며, 그들을 친밀하게 사랑한다는
둘째, 하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2절부터는 우리의 현세의 삶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고난과 역경이 그의 백성인 우리에게서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풍파와 환란속에 함께하시며 우리를 지키 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홍해의 산을 의미하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는 것은 다니엘의 세친구의 풀무 구원을 예시합니다.
셋째, 장차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하고 영화롭게 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4-7절) 하나님은 우리를 이제 이후로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로 만드십니다.
끝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높고 위대한 먼 곳에 계신 하나님께 외치는 식으로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나를 너무 잘 아신 하나님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으로 여기고 기도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셨고, 조성하셨는데, 이제 나를 부르셔서 메일 나의 삶에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를 영화롭게 하시고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실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시작되는 한 해에는 나의 과거는 나에게 비춰지는 거울로만 삼고 오늘 아니 지금 내가 어떻게 주 앞에서 살 것인가를 생각한 성도가 되십시다. 사탄은 나를 자꾸 과거로 돌아가도록 유혹합니다. 옛날에 미련을 두지 말고 지금 나의 모습 이대로 주 앞에 나오고 나의 주어진 것에서 무엇을 해야 생각하는 우리의 심령이 되십시다.
December 31, 2023
본문: 창세기 12:1-9
그리스도인의 인생 여정
다사다난했던 금년2024년 한해도 벌써 우리들의 기억속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의 시간은 벌써 새해가 밝았습니다. 우리 한국의 어른들이 “우리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자주 말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나그네와 같은 인생길을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람은 오늘의 본문을 보면 그가 75세에 그의 가장 큰 인생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에서 불러내신 것은 우리 기독교의 구속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 1장부터 11장 까지는 우주의 인류와 민족의 시작을 기록한 역사입니다. 그리고 12부터 50장까지는 여러 민족 중에서 특별히 선택받은 히브리 민족의 형성의 역사입니다. 창세기 3장이후는 노아의 이야기만 제외하고 인간의 타락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 후손의 줄기에서 그리스도가 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장의 족보를 통해서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본토에서 불러내시고 하란을 거처 가나안 땅에 기거하게 하는 야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시고 떠나게 하는 사건속에서 이세상에서 나그네 된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가져야 할 크게 세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히브리서 11:8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순례자요 나그네가 되기 위하여 그의 본토와 집과 친척들과, 그의 초기 생애에 관련된 모든 즐거운 교제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유대 전승에 ‘아브라함이 자기 아버지가 팔던 우상을 때려 부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2절에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라는 구절만이 부름받기 이전의 그의 가족사에 대한 유일한 기록입니다. 다른 유대 전승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우상을 만드는 것을 보고 자란 아브라함이 우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으며, 따라서 일찍이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외경인 ‘유딧서’ 5장과,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의 ‘Jewish Antique’ 1장은 ‘아브라함은 우주를 창조하신 유일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오기전 가졌던 관습과 행동들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나그네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아직 확실한 목적지를 가리켜 주시지 많았어도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신뢰하고 긴 여정을 떠났습니다. 하란에서 가나안까지 650km정도 되는데, 그 당시 그는 나귀와 도보로 그는 긴 여정을 감내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대 사회에서 자기가 살던 터전을 옮긴다는 것은 여러가지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언어와 풍습이 전혀 다른 곳에 가서 삶을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거나 삶의 순간 속에서 확실한 앞의 목표가 보이지 않을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하는 목표 잘 보이지 않는 어둡고 캄캄한 길을 갈 때도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약속의 땅을 향해 길을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는 약속한 땅에 이르러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것을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사의 목적은 은덕에 대한 감사이며, 그의 이름을 기리는 것입니다. 성경속에 위대한 사람은 다 예배에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유대인은 새로 이주하는 곳에 은행을 세우고, 중국 사람은 음식점을 차리고, 한국 사람은 교회를 세운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인생은 나그네의 길이며, 순례자의 길입니다. 특별히 이곳 미국에 온 우리들은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의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하며, 가는 곳마다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December 24, 2023
본문:마태복음 2:1-6,
누가복음 2:1-7
구세주 오신 그 날
우리가 성탄절이 다가오면 서로 나누는 인사말이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이 말은 ‘기쁨의 구세주 탄생 소식’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스페인어로 펠리츠 나비대드(Feliz Navidad), 그리스어로는 ‘칼라 크리스토게나(Kala Christougena)’, 그리고 독일어로는 ‘프뢸리히 베인아크텐(Frohliche Weinachten)’고 하고, 프랑스어로는 ‘조이유 노엘(Joyeux Noel)’이라고 한답니다. 우리가 드리는 크리스마스 찬양 속에 나오는 ‘노엘’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재미있는 말로 일본사람들은 얼마 전까지 만해도 ‘메리 구리수마수’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저는 어린 소년이었을 때 크리스마스 카드 윗 부분에 ‘축 성탄’이라고 쓰지 않고 ‘성축탄’이라고 썼던 우수운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가 들어간 모든 나라에서는 그리스도의 탄생의 기쁨을 그들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세상 어느 민족이나 그 누구에게라도 우리를 죄에서 구하기 위해 오신 구세주의 탄생 소식은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지금부터 2020여년 전 우리 구세주 예수그리스도 오셨을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극히 소수의 무리들에게만 구주의 탄생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구세주의 탄생을 맞이했을까요? 성경 본문에서 동방의 동방의 박사들은 별의 인도함으로 먼길을 여행해 와서 구세주를 맞이하였습니다. 외경에 보면 이들의 이름이 Caspar, Mechior, Barthasal 이라고 전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이들이 점성가 또는 천문학자였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초대의 교부이며 유명한 설교가인 크리소스톰은 그때에 천체에 이상적 현상이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이 동방박사들을 원어에 ‘마고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신비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 누가복음에는 벧을레헴 들녘에서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구주의 탄생이 천사들에 의해 전해져 그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예수님을 처음 경배한 사람들은 이방인이거나 유대의 주류세력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류세력인 해롯왕에게는 구세주의 탄생이 그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라 극도의 불안을 느낄 정도의 사건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탄생 당시 주위의 사람들은 어떤 마음과 상황속에 있었는 지를 살펴보고 오늘 이세대의 우리는 어떤 마음과 자세로 구주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해야 하는지를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크리스마스 캐롤 송’의 의미는 기쁨의 춤을 추며 부르는 노래라고 한다. 우리는 주의 탄생을 맞이할 때 그저 날뛰는 마음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감사와 존경의 마음으로 주를 대하여야 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세상의 낮은 곳 벧를레햄 마구간에서 태어났는데 뭐 그리 기뻐 춤출 일입니까? 크리스마스의 캐롤 중 많은 노래들이 기독교의 교리와 상반되는 가사들이 많습니다. ‘루돌프 사슴코’ ‘징글벨’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 등의 가사가 그렀습니다.
둘째,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기 위해 오신 구주를 대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속된 말로 너무 뻔뻔하게 주 앞에 나오기보다 공로 없고 자격 없는 자를 구원하러 오신 그 구주를 겸손히 영접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감당할 아이였지 않습니까? 그 당시 아직 훗날을 모르는 사람은 새로운 유대인의 왕이고 그들을 구할 메시야였으니 일단 기뻐하고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생애를 다 들었고 그분의 희생과 대속으로 구원을 얻은 우리는 마냥 기뻐 할 수만은 없습니다.
셋째, 예수님이 바라보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떤 현인처럼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작은 고을 벧을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 말 구유위에 누이셨습니다. 그분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행하신 ‘5병2어의 기적’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힘든 놀라운 기적이지만 결코 호화로운 식사가 아니고 가장 평범하고 소박한 백성들의 한 끼니였습니다. 그리고 그 남은 음식을 버리지 않고 거두어 놓아야 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우리가 자주 듣고 부르는 “Feliz Navidad”란 노래가있습니다. 푸에르토리코의 가수 겸 기타리스트이자 작사가 겸 작곡가이며 영화배우, 그리고 시각장애인 인 호세 펠리시아노가 작곡하여 부른곡입니다. 이분이 하루는 말하기를 “나는 세상에 누구보다 인종 편견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그 이유는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내가 볼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어떤 사람이 나 대신 형벌 받으므로 내가 세상에서 자유인이 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나는 평생 그분 앞에서 항상 감사의 마음과 겸허함으로 몸 둘 바를 모를 것입니다.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고난 당하시고 죽으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하며 우리는 더 겸허하고 낮아지며,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December 17, 2023
본문: 누가복음 1:45-55
어두운 곳에 빛으로 오신 예수
우리가 성탄절이 가까워 오면 하는 행사들이 있는데, 가난한 이웃과 가련한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푸는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얼마만큼 영적인 수양이 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었느냐 에 따라 그 신앙의 등급을 매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을 하나님이 보시면 모두 도찐개찐이며,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영적 수양이 많이 되어도 사탄의 개교나 자기의 실수로 인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것입니다. 카톨릭교단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신앙의 훈련이 불쌍한 영혼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열심 있는 신앙의 영적 수준이 높아도 다른 불쌍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의 신앙 훈륭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6:19-20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십니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 긍휼과 자선을 배푸는 것이 우리의 보물을 하늘나라 곳간에 쌓아 두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전후로 하여 3가지 ‘찬가’ 즉 찬양의 노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리아의 찬가,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찬가(1:68-79), 그리고 아기 예수를 안은 선지자 시므온의 찬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성모 마리아가 자신에게 구세주가성령으로 잉태되도록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그녀의 찬가가 나옵니다. 우리가 ‘강림절’ 셋째 주에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갖어야 할 몇가지 참 신앙인의 성품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어떤 자신의 위치에서도 겸손함을 잃지 말고 하나님만을 찬양하여야 합니다. 본문 48,49절을 보면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라한 말씀을 봅니다. 참고로 천주교에서 기도하는 기도문 중에 이러한 기도가 있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아멘.”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글을 보면 마치 성모 마리아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가 됩니다.
둘째, 긍휼함과 인자한 성품을 갖어야 합니다. 50절에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라고 하십니다. 눅 2:19에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말이 있습니다. 2:33에 시므온의 찬가를 듣고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고 하였고, 또 어린 시절 나사렛에서 2:51에 “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그 마음에 두니라.”는 것을 보면 인자한 마리아의 성품을 볼 수있습니다. 에베소서 4:32에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셋째, 주의 복음이 임하는 많은 놀라운 반대 현상이 나옵니다. 본문에 내용을 보면 그리스도복음이 나타나는 곳에 나타나는 변화가 있는데, 51-53절에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 고백을 통해 보면 이러 합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라고 대조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이세상 기준과 반대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유명한 성프란시스코의 기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라는 기도입니다.
넷째, 주의 은혜가 임하면 새상으로 향한 마음이 터지고 넓어지는 것입니다. 54,55절에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의 자녀는 항상 마음을 좀 넓고 너그롭게 가저야 합니다. 본문속에서 마리아는 자기 자신과 가족이 아닌 온 세상에 오는 큰 기쁨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주의 약속이 말씀대로 이루어 지리라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본문 전 45절에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라고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빛으로 나오는 우리는 주의 말씀이 어두운 세상을 밝게 하리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사가랴 , 엘리사벳, 마리아 시므온, 안나 등 이 모든 분들은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분명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안고 부르는 찬가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우리는 대강절에 주의 구원을 이미 보았음을 감사하고 또 장차 이 비추는 빛을 앞으로 볼 것에 대해 감사하고 찬양 합시다.
December 10, 2023
본문: 이사야 11:1-9
하나님 나라 임하시네
오늘은 대강절(Advent) 두번째 주일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드릴 때 두번째 소절이 있는데, 그것은 “나라이 임하옵시며”입니다. “나라가 이곳에 임하옵시며”란 말인데, 옛날에 우리가 쓰던 문구로 우리는 지금도 ‘나라이’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속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우리가 있는 곳에 임하는 것은 그만큼 소중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대강절을 ‘Advent’라 하였는데, ‘강림’ 또는 ‘임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육신’ 육체로 임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천국’이란 말은 38회에 만 나오지만 마태복음에 37회가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란 말은 51회 나옵니다. 이는 모두 신약에만 등장합니다. 그런데 구약에는 ‘하나님 나라’란 낱말이 나오지 않지만 John Bright에 의하면 구약 전체에 하나님 나라의 사상은 줄기를 차고 흐르고 있습니다. 출 15:18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나오는 표현을 시작으로시편 9:7-8에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등에도 나온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이 우리 통치하는하는 곳에만 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대강절 2째 주일에 ‘하나님의 나라’는 그분에 아들과 관련되어 임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고 그의 영이 임함으로 이루어질수 있습니다. 역대상 16:31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할지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사람에게 임합니까?
먼저, 그의 아들을 영접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요한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두번째, 겸손한 자에게 입합니다. 그리고 미천하고 연약하고 겸손한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의 “이새의 줄기에서 한싹이 나서”나고 하였는데, “다윗이라 하지 않고 평민이었던 그의 아버지를 표현한 것은 미천하고 연약한 곳에 구세주와 그 나라가 임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라고 신학자 Rawlinson이 주장합니다. 본문에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했는데, 가지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네체르’인데 이 말에서 신약에 ‘나사렛’ 지명이 생긴 것입니다. 마태 2:23에 “나나렛 사람이라 칭하니라”는 예언이 본문에 유추된 것으로 해석됩니다.
셋째, 하나님이 통치하실 수 있는 나의 삶 속에 만 임하십니다.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 그의 왕국 ‘바실레이아’는 ‘통치하다’란 동사 ‘바실레이오’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영성 명사입니다. 우리가 신랑되신 예수를 온전히 의지할 때 그의 나라는 나와 내 삶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나라는 우리가 속한 어느 곳에 임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나라가 내 영혼속에 임해야 한다. 누가 17:20,21에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둘째, 내 의식주 속에 임해야 합니다. 2절 말씀에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신 성령의 양향은 다각적으로 인간신체의 본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으로 보여 줍니다. 본문에서 성령의 양향에 대해 3가지 를 제세하는데 1)지혜와 총명은 지식과 도덕적 이해로서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2)모략과 재능은 즉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능력이나 사상을 행동화 할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3)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은 참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나 그 뜻을 온전히 수행한 능력을 말합니다. 1980년대 젊은청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김준곤 박사는 그의 예수 칼럼에서 “기도는 노동이고 생산이며 능력이다. 조지 뮬러는 생전에 5만번이상의 기도 응담을 받았다. 기도는 통계적으로 어떤 효과 보다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기도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을 헛 사는 것이며 자연 법칙에서만 사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속한 사회 속에 임해야 한다. 마가복음 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51:4-5 “내 백성이여 !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발할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링컨 대통령의 신앙의 십계명: 1) 나는 주일을 지키며 예배 생활에 힘쓸 것이다. 2)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실천할 것이다. 3) 나를 지켜 주시는 아버지께 날마다 겸손히 기도할 것이다. 4)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이다. 5)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할 것이다. 6)나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할 것이다. 7) 하나님만 높여드리고 그분께만 영광을 드릴 것이다. 8)하나님 안에서 우리모두는 자유하고 평등하다고 믿는다. 9)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의 명령을 실천할 것이다. 10) 이땅 위에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가 실현되도록 기도할 것이다.
December 3, 2023
본문: 요한복음 3:1-8
성령으로 난 사람
오늘은 금년 대강절의 첫째 주일입니다. 교회 절기로서 대강절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 전의 4주간을 가리킵니다. 대림절이라고도 불리는 대강절은 세상에 메시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앞서 그의 오심을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하기 위한 기간입니다. 한편 서로마 교회에서는 대강절이 시작되는 대강 주일을 St. Andrew's Day인 11월 27일에서 가장 가까운 일요일로 정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대강 주일이 시작되는 날짜는 11월 30일보다 빠르지 않고 12월 3일보다 늦지 않습니다, 이러한 계산법에 의하면 성탄절 전까지 대강절에는 4번의 주일이 있게 됩니다.
대강절은 오신 예수를 기리기도 하지만 오실 예수도 기리는 것입니다. 4복음서에서 유대인의 지도자였지만 예수님을 존경하며 도왔던 두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었습니다. 본문3:1에서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마태복음에는 부자로, 마가복음 15:43에는 공회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바리새인은 율법을 엄격히 지키며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예수님을 공격하곤 했던 유대인 집단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큰 관심을 같고 지원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3:50-51에는 아리마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며 예수님에 대한 공회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9:38은 비록 요셉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은밀히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장사할 준비를 하는 데 사용할 향품을 백 리트라쯤 가져왔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 무덤에 넣는 것을 도왔습니다. 장례를 위한 향품의 양을 통해 니고데모가 부자였으며 예수님을 크게 존경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에 니고데모에 관한 성경의 기록을 살펴봅시다.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논의할 때 그가 산헤드린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 어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도록 성전 경비병들을 보내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경비병들이 그대로 돌아오는 장면이 있습니다(요 7:32-52). 권위 있는 바리새인들이 경비병들을 책망했습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들이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그분을 면직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요 7:51).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의 초기에 있었던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속에서 오늘 대강절 첫 주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들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먼저 성령으로 난 사람은 예수님을 은밀하고 고요한 중에 만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과 이야기하러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니고데모가 환한 대낮에 예수님을 방문하는 것이 두렵거나 부끄러워서 밤에 방문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추측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그가 밤에 방문한 이유에 대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다른 여러가지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을 통치하는 공회의 일원으로서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선생이나 공인에 대해 알아내는 것은 그의 일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만남을 통해 중생이 무엇인지 성령으로 난사람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둘째, 성령으로 난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도 하나님께 온전히 맞기고 성령의 흐름에 따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은 깨끗이 우리 몸을 씻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가 강물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큰 흐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우리가 불러서 쓰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곁에서 흐르는 강물 같은 성령의 역사에 우리 자신을 맞기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전설적 음악지휘자인 Herbert von Karajan이 우리 한국의 세계적 소프라노 조수미를 키우기도 했는데, 하루는 조수미를 가르치는 도중 중요한 두가지의 말을 합니다. “너는 음악에 흐름에 내몸을 맞겨라” “네가 느끼지 못하는 곳에도 음악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을 내속에 오라고 부르기 보다는 이미 우리 속과 주위에 임하고 있는 성령이 우리를 주관하도록 우리 자신을 성령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 성령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내가 느끼던 느끼지 않던 간에 성령은 우리의 속과 주위에 임하고 계십니다.
셋째, 눈으로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예수의 영의 역사를 발견하고 체험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묵상하고 깊은 영적 기도를 드리다 보면 우리의 곁에서 늘 함께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감지하고 채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께서 성령을 표현하시며 ‘바람이 불매’라고 예를 들었습니다. 히브리어 ‘루하흐’나 헬라어 ‘프뉴마’ 는 바람과 성령을 뜻한다. 바람과 성령의 공통점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 그 자체는 보이지않으나 그 자체는 보이지 않으나 그 역사의 표적은 보이는 것, 인간의 의지로 좌우할 수 없는것이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가장 고통스런 수난의 기간동안, 자신들에게 닥쳐올 두려움에 주의 제자들 마저도 숨어보리고 보이지 않던 순간에 예수님을 도왔던 니고데모의 예수님을 만난 후의 삶을 우리는 압니다. 비록 특별히 예수님을 드러나게 따르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가장 어려운 순간에 주를 도왔던 그들의 행적을 통해 우리는 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과의 대화를 통해 성령으로 난 삶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그의 삶에 적용하려 했던 사람이 아닌가 저는 생각해봅니다. 이제 우리도 이미 우리 속과 주위에 임하고 있는 성령이 우리를 주관하도록 우리 자신을 성령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 성령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내가 느끼던 느끼지 않던 간에 성령은 우리의 속과 주위에 임하고 계신다는 믿고 우리 자신들을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November 26, 2023
본문: 시편57 7-11,
사 도행전13:21-23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서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세 사람이 있는데,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입니다. 오늘은 세사람이 중 한사람인 다윗이란 사람과 그의 삶을 통해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다윗이란 이름의 뜻은 ‘사랑하는, 사랑받는’ 란 뜻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향하여 ‘내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으니까요. 정말 부러운 것은 온우주를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자기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으니 말입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이 그를 자기 마음에 합한자라 했을까요? 영어 표기로 ‘R’ 로 시작하는 네 단어로 표현하는 그의 성품을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본론: 먼저, 그는 항상 준비되어진(Ready) 사람이었습니다. 삼상 16:18을 보면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하더라” 그는 고독한 양치기의 생활속에서도 자연속에서 수금을 익히고, 사자 등 사나운 짐승으로 부터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용맹한 근력을 가진 용사가 되었고, 물 맷돌을 던지는 법을 익혔다. 그의 이런 명성이 알려져 사울왕이 궁중으로 불러 악신을 내쫓는 연주를 하게하며 그의 무기를 관리하는 일을 하게하였다. 구약 시편 중 88편이 다윗이 기록했다고 본다. 왜 다윗이 시편을 많이 기록했을까요? 다윗이 하나님을 많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을 ‘경험의 시’라고 얘기합니다. 그냥 시를 기록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경험을 담아 시로 기록한 것입니다. 남이 경험한 것이 아니고, 머리에서 짜낸 것도 아니고, 가슴에서 나온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신적,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좋은 환경과 훌륭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가장 거 칠은 광야에서 자기의 연마를 하며 악기를 익혀 오히려 푸른 초장이 되게 했다. 삼상 17:34-36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는 평생을 하나님 앞에 준비 되어진 자로 살았다.
둘째, ‘성실과 겸손함 가운데 항상 하나님을 기뻐하는 찬양(Rejoiced to God with integrity and humility)하는 사람’ 이었습니다. 시편의 절반이상이 다윗의 시라 했습니다. 그는 이 시들을 통해 다윗은 구원의 기쁨을 주시고 삶을 푸른 초장으로 이끄신 주를 찬양합니다. 소년시절 사울 왕이 그를 불러 곁에 두고 수금타는 일과 무기를 관리하는 일만 하게 했지만 자주 벧을레헴에 가서 양치는 일을 하였다. 골리앗과의 싸움전에도 그는 그곳에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뿐 아니라, 성실과 겸손한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 다윗만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간 인물도 드물것 입니다. 인생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고통의 시간과 승승장구하는 영광의 순간을 한 몸에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이렇듯 끊임없는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의 롤러코스트를 거듭 하지만, 그가 걸어가는 자세는 결코 요동치지 않고 여호와를 기뻐했던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놀라울 만큼 성실함으로 살아 갔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그가 완벽한 삶을 살았다는 뜻이 아님도 우리는 잘 압니다. 우리는 그의 실수와 연약을 또한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의 성실과 겸손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 하였도다” (시. 78:70-72) 라고하였습니다.
셋째, 그는 회개할(Repent)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삼하 12장을 보면, 다윗이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빼았고 그를 전쟁에서 죽게 한사건을 나단 선지자는 그의 앞에서 정면으로 책망합니다 그는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시편 51편의 말씀처럼 통회의 바로 자백을 하였습니다. (시 51:10)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환란가운데 가장 먼저 회개해야 곳은 교회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주를 모르는 세상을 심판 하기 전에 주를 알고 경험했던 교회를 책망 하십니다. 25년전 우리가 자주 불렀던 ‘부흥’이라는 찬양의 가사의 일부분입니다. “이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 하소서. 이 땅 고쳐 주소서. 이제 우리모두 하나 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 20년 전에 나왔던 ‘부흥 2000’이라는 찬양의 가사. “거짓과 탐욕, 죄악에 무너진 우리 가슴 정케하소서.”라는 가사를 보면 이미 그때부터 한국과 미국의 사회와 교회는 병들어 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넷째, 그는 항상 마음이 부하여(Rich to honor God) 하나님을 높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모욕하는 골리앗에게 나아가며 했던 그의 말 “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가,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 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고 군사 3천명을 데리고 쫓아다녔던 사울이 그가 머물고 있는 굴에 들어와 자기 앞에서 잠자고 있는데도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내가 해할 수 없다는 말을 하며 그의 옷깃만 잘라 내었다. 그는 이처럼 관용이 그 속에 풍부한 삶이었다.
다섯째, 그는 자신을 늘 개혁해(Reform)가며 신앙을 가다듬(revive)는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57:8,9에 “내 영광아 깰찌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찌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9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57편은 바로 다윗이 아둘람에 있는 굴에 피신해 있을 때 지은 시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잡아죽이기 위해서 3,000명의 수색 부대를 조직해서 그를 좇아다녔습니다. 다윗이 가는 곳마다 집요하게 좇아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하여 안 가본 데가 없었습니다. 적이었던 블레셋으로 도망하기도 했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아둘람 굴 속에 숨어 지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그는 자신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결론: 하나님은 다윗이 흠이 없이 완벽해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한 것이 아닙니다. 주를 영화롭게 하기위해 늘 준비되어진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과오를 주 앞에서 통렬하게 자백하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산 것입니다. 늘 자신을 개혁하며 신앙의 내적 부흥을 갖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그의 영육의 삶에서 항상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이 늘 여호와로 인해 풍부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이게까지 자랄지라.”
November 19, 2023
본문: 골로새서 3:12- 17,
빌립보서 4:6-8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그리스 철학의 3대 산맥을 이루는 철학자중 한명인 플라톤은 네가지 사실에 대해 감사했다고 합니다. 첫째, 동물이 아니고 만물의 영장인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했습니다. 둘째, 문명국인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태어난 것에 감사했습니다. 인류에게 정치와 예술과 사상면에서 가장 큰 나라가 그리스입니다. 셋째, 남자로 태어난 것에 감사했는데, 그리스가 민주주의의 발생지라 하지만 그 시대의 여성의 대한 편견은 구약의 사상과 별차이가 없었습니다. 넷째, 소크라테스 시대에 태어나 훈륭한 스승의 문하에서 공부한 것에 감사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감사’라는 단어가 189회 신구약에 등장한다.189회 중에, 153가 동사, 형용사는 15회 명사는16회에 불과하다. 구약에 ‘토다’라는 단어로 139회 신약에 ‘유카리스티아’라는 단어로57회, 바울 서신에 43회, 옥중 서신에 12회. 그리고 본서에7회 본 장에 네 번. 시편 136편엔 26전절에 ‘감사하라’가 들어있습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함께 상고하려 합니다
본론: 먼저. 감사는 Gratitude라고 표현합니다. 이 뜻은the quality of being thankful; readiness to show appreciation for and to return kindness. 감사는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엡2:8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선물이라 했고,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 은혜도 하나님의 선물(롬5:8), 우리에게 주신 성령도 하나님의 선물(행2:38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은 인간이 행해야 하는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것은 신앙인의 덕목 중 가장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이사야 1:3)라고 하셨습니다. 감사는 받은바 은혜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미국의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약 4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620년 12월 11일, 유럽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라는 배를 타고 미 동부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에 도착하게 됩니다.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의 종교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오게 됐지만, 미국에는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죠. 새로운 땅에 도착한 첫 겨울, 혹독한 추위와 낯선 환경으로 인해 메이플라워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온 102명 이민자 가운데 46명이 그해에 겨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도 첫해 가을에 역경과 환란이기게 하시고 첫 수확물을 얻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를 드렸습니다. 시편50:14,15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죄”라고 했습니다. 죄 된 인간은 감사를 모릅니다. 세상에서 잘되는 일은 다 자기 탓이라 생각합니다. 몸이 건강하면 자기가 건강조절을 잘해서 된 일로 압니다. 먹을 것이 넉넉하면 자기가 사업을 잘한 탓이라 생각합니다. 가정이 평안하면 자기가 가정관리를 잘해서 되는 줄로 압니다. 이것이 죄인 된 인간의 심사입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반대로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땐 책임을 전가하며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이러한 죄인의 본성에 대하여 성경은 기록하기를“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나니”(로마서 1:21)하셨습니다. 미련한 사람의 마음, 거짓이 많아 믿을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은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약성경 유다서에는“이 사람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유다서 1:16)하셨습니다. 육신의 정욕대로 살아가는 타락한 사람이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평을 일삼고 감사를 모르는 것이 죄인 된 인간의 특성입니다.
둘째, 감사는 Thanksgiving입니다. 많은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셨던 것만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앞으로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한다. 지금 어려운 상황이라도 앞으로 뭔가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조그만 일에도 감사. 예)토마스 에디슨의 기차 화제사건), 심장병을 무료로 수술받은 강 계영양의 가족-천여만원의 성금을 다른 아이의 심장병을 수술을 위해 헌납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만화가 가운데“찰스 슐츠”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만화는 사람의 생활 형편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많은데, 그의 만화 그림은 신앙인에게 도움을 주는 내용이 종종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만든 만화 가운데“스누피”라는 강아지가 종종 나옵니다. 추수 감사절이 되었습니다. 스누피는 개니까 감사절에도 개밥을 먹었습니다. 주인집 사람들은 모두 칠면조 고기를 먹는데 스누피는 개밥을 먹습니다.“이럴 수가 있나?”하고 스누피는 자기 집 지붕에 올라가 누워서 생각합니다.“감사절에 집안 식구들은 다 칠면조를 먹는데 나는 어쩌다가 개가 되어서 개밥을 먹는고? 세상이 참 불공평하구나! 내 신세가 이게 무엇이람?”그리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까 얼핏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 신세가 더 나빴을 수도 있지!”하는 생각입니다.“내가 개가 되지 않고 칠면조가 되었더라면 오늘 죽었을 것이 아닌가? 내가 만약 칠면조였다면 오늘 사람들에게 잡혀 먹혔을 것이 아닌가! 야! 내가 칠면조가 되지 않고 개가 되어서 살았구나!”그래서 스투피는 감사했습니다.
셋째, 감사는Generous즉, 관대함과 너그러움 입니다.1621년이들은 원주민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 해 가을에 나름대로의 결실을 보게 됐죠. 그러자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도와준 인디언들을 초대해 그 해 거둬들인 농산물과 사냥으로 잡은 칠면조를 나눠 먹으며 감사의 축제를 벌였는데요. 이 감사 축제가 바로 추수감사절의 기원이라고 하겠습니다. 감사를 자기와 하나님 만의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다른 사람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감사하는 자의 덕목입니다. 하나님께 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의 전통은 후세대로 이어지긴 했지만 이후 2백 년 동안은 개인별로 혹은 각 주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보냈죠. 그러다가 남북전쟁이 한창인 1863년, 사라 헤일 여사의 주창으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11월 마지막 주 목요일을 국가 공휴일인 추수감사절로 지정하게 됩니다. 링컨 대통령은 추수감사절을 선포하면서 전쟁으로 고통받은 사람들, 전쟁으로 인해 과부나 고아가 된 사람들을 신께서 보살펴 주시기를 간청하는 날로 삼자고 선포했습니다.
네번째, 감사한 순간은 평생 간직해야 합니다. 그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늘 마음 속에 오래 간직해야 합니다. 미국의 정치가 가운데 Daniel Webster(1782-1852)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미국 상하 양원에서 의원을 지내고 국무장관을 두 차례나 지낸 사람입니다. 이러한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것저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럴 때 웹스터는 찾아온 사람을 다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얼굴은 낯이 있으면서도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정해두고 묻는 말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전에 불평하시던 일이 어떻게 종결되었습니까?”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설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렇게 저것이 저렇게 되고...하며 설명을 하는 동안에 웹스터는 기억이 되살아나서 그 사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그렇습니다. 사람에게는 늘 불평이 있고 그 불평을 토해낼 기회를 주면 누구나 본색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죄인의 특성입니다.
끝으로, 영어의“감사하다(thank)”라는 말과“생각한다(think)”는 말은 비슷한 어원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감사하려면 생각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얼핏 볼 때에는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생각해보니까 감사합니다. 감사는 얕은 생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숨겨진 마음의 보화입니다. 그래서 유태인 신학지인 몬테 피오레는“생각하고 감사하라.(Think and Thank)”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면 감사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온통 은혜로 충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범사에 감사하라.”하셨습니다.
빌4:6-8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말씀을 우리 마음판에 새기며 감사가 충만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November 12, 2023
본문: 에베소서 3:14-21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을 알고, 영적으로건강한 교회를 다니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인도하면서도 여전히 영적으로는 차갑고 무미건조하며 또 초연한 상태를 유지하는 분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또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안다. 그리고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이런 강력한 진실은 종종 지적인 수준에 머물 수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제 말을 이해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사는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늘 본문의 에베소 사람들은 바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똑똑히 알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 달라는 바울의 기도가 오늘 본문속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초대교회의 올스타 같은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에는 책망이 거의 없으며 그들은 신학과 영성 형성에 있어서 “고기”를 먹을 준비가 된 것 같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성도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애썼다. 이 도전의 역사는 기독교 역사속에서 길게 나타납니다. 에베소서에서 먼저 긴 신학적 논설(1-3장)과 실제적인 가르침(4-6장) 사이에서 바울은 3:14-21에서 잠시 멈춰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경험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할 때 자세를 보면 내면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펴고 책상에 앉아 일기장에 적으면서 하는 기도는 이해와 지혜를 구할 때 적합한 자세이다. 침대에 누워서 반쯤 졸면서 하는 건 내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겠다는 기도를 할 때 합당한 자세가 아님니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말로 표현할 길이 없어 신음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심오한 투쟁이나 열정의 순간이다. 그게 지금 바로 바울이 기도하는 자세이다.
그런데 바울의 기도에는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넘치기를 구한다. 그런데 1-3장에서 그는 이미 이 세 가지가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위해 왜 그는 또 이토록 뜨겁게 기도하는 걸까? 에베소 성도들은 이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채워져야 할 또 다른 수준의 지식과 경험이 필요했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가지신 모든 것을 “잡게”(grasp) 해달라고 기도할 때(18절), 이 단어는 ‘씨름하다’ ‘빼앗다’ 또는 누군가를 ‘압도하다’를 의미하기도 한다.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씨름이 무엇인가? 나 자신, 나의 혼, 나의 육체, 그리고 나의 속사람과 싸우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붙잡고, 그 사랑을 우리 마음에 넣는 씨름을 하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려고 해야 합니다. 본문에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엡 3:16-17)라고 바울은 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근원은 다름 아니라 성령님이십니다. 바울은 지금 “복음 진리에 대한 영적이고 내적인 민감성”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대한 민감성은 무미건조하고 안일한 신자와 따뜻하고 열정적인 신자를 가르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성령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시고(엡 1:17; 3:5; 6:17),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고(엡 3:16; 5:18-19; 6:18),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롬 8:9-11), 영광이 커지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신다(고후 3:18). 우리가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 수 있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시 34:8).
우리 마음을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울 수 있을까?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어떻게 도우시는가? 바울의 기도를 보면 답을 알 수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엡 3:17-19).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경험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천천히 시간을 들여라. 살면서 힘든 것 중 하나가 항상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속도를 늦추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낼 때조차도 우리는 여전히 바삐 움직이는 삶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다. 서두름은 우리 속에서 성령을 소멸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서두름을 마음속에서 끊어내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지속해서 구하고 또 듣는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둘째, 말씀을 묵상하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진리를 마음에 새기는 법을 배우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는 온 힘을 다해 기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 묵상의 실천이다.
George Muller는 묵상의 중요성을 발견한 인물이다. 매일 내가 참석해야 하는 첫 번째 크고 중요한 일은 다름 아니라 주님 안에서 내 영혼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가장 먼저 염려해야 할 것은 내가 얼마나 주님을 섬기고 어떻게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내 영혼이 주로 인해 행복한 상태에 머물고, 내 속사람을 살찌울 수 있을까이다. … 속사람을 위한 양식은 무엇인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그냥 단순히 읽기만 하는 게 아니다. 그런 경우 물이 파이프를 통해 흐르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의 마음을 타고 흘러가 버린다. 그러나 읽은 다음에는 숙고하고 또 숙고함으로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적용해야 한다.
셋째 십자가를 묵상하라. 바울은 우리가 일반적인 하나님의 사랑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까지 붙잡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는 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강조할까? 우리가 십자가를 묵상하도록 그렇게 한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 갖기를 기도한다. 이는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폭과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게 하려 하심이다. 예수님께서는 마 28:20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다스리시는 높은 천국에 닿을 정도까지 높은 사랑으로 함께하십니다.
얼마나 깊습니까? 무덤보다도, 지옥 구덩이보다도 깊게.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읽을 때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몸을 상기했다. 예수님의 손은 양쪽으로 넓게 뻗어졌고,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높이 그리고 깊게 당겨졌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담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도무지 측량할 길이 없다. 그 사랑은 항상 더 깊다. 십자가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더 깊이 담을 수 있는 길은 없다. 속도를 늦추고 시간을 내라. 말씀을 묵상하라. 온 힘을 다해서, 그리고 성령의 영원한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에서 드러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붙잡아라.
November 5, 2023
본문: 갈라디아 6:4-14
우리 신앙의 개혁
이제 우리는 감사의 달 11월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 10월 31은 세상 사람들이 귀하게 지키는 ‘Halloween Day’였으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날 중에 하나인 506번째 맞이하는 종교 개혁의 날이었습니다. 요즘은 그리스도인들도 할로윈은 기억 잘하지만 종교 개혁일은 기억하지 못하고 지나갑니다. 이날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지 우리는 알고 그날을 기념하며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적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이날에 우리는 우리 신앙을 점검하고 그릇된 우리의 삶을 바로잡는 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마틴 루터가 1517년 천주교의 부패와 맞싸워 일으킨 역사적인 날이 10월 31 입니다. 중세 천주교의 타락의 극치인 면죄부까지 팔아 베드로 성당을 지으려 할 때,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문에 붙여, 그 당시로서는 바위에 달걀 던지는 식으로 대항했지만 결국은 때가 되어 하나님의 역사로 종교개혁이 성공한 날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말씀에서 벗어나 인위적으로 갈 때마다 개혁이 일어났고 그러던 것이 구체적으로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교회개혁의 조짐이 있었다. 특별히 교황 무오설를 비롯한 천주교의 잘못된 엉터리 교리를 공격하고 성경의 유일한 권위를 주장한 존 위클리프와 하나님의 죄사하시는 권세를 인간의 물질적인 목적을 위해 도용한 면죄부 판매를 전면에서 반박한 존 후스 같은 교회 개혁 선구자들의 주창이 마틴 루터에 의하여 불이 붙게 됐고, 그 당대 석학인 존 칼뱅과 쯔빙글리 등 영적으로 깨어있고 준비 된 개혁가들로 인하여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종교개혁은 단지 16세기에 와서 교회를 정화했다는 것으로 그 의미를 축소 시켜서는 안 된다. 개인의 신앙과 성경의 절대 권위 그리고 교회의 봉사적 사명을 확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종교개혁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 잊혀지는 것이 되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 안에도 복음의 왜곡, 황금만능주의 사고방식, 세속적인 문화의 흡수, 성경 말씀을 등한시 하는 경향 등, 개혁되어야 할 요소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상이 종교개혁일을 대치한 할로윈을 교회들은 영적으로 예의 주시해야 한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에서 할로윈의 역사적인 유래만 보더라도 이 명절이 마귀의 명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사탄 숭배자들은 이 명절을 가장 큰 행사로 여기며 사람들이 악령과 친근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기고 있습니다. 미국의 할로윈 데이는 1800년 후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이민자들에 의해 시작됐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어떤 신앙의 개혁을 이루어야 하는지를 상고하여 보겠습니다. 본문 11절의 보니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낭독한 이 말씀은 육체적 형식적 삶을 버리고 우리의 신앙을 개혁하는데 정말 소중한 말씀임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개혁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 자신을 살피라고 합니다. 본문 4,5절에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육체적인 것을 내 속에 심지말라. 8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십니다. 헬라어로 “육체의 모양을 내다” 로 표현된 말이 “유프로소페사이”인데 불성실하게 모양만 내다는 뜻입니다.
셋째, 선한 생각을 하고 선한 일을 이웃에게 행하는 사람이 되자. 본문9,10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 빌2:3,4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넷째 자기 자랑을 너무 많이 하지 말고 내속에 계신 그리스도만 자랑하자.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세계적인 화가 ‘도레(Dore)’가 남부 유럽을 여행하던 중 자신의 여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가 한 국경에 이르자 국경 통과 검열을 하는 사람이 그를 세워 여권을 제시하라고 하자, 자신을 여권을 잃어버렸다고 하면서 “나는 당신도 잘 아는 화가인 ‘도레’입니다. 부디 나를 통과시켜주세요”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원칙적으로 아무도 여권없이 통과시킬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하였습니다. 도레가 자기의 사정을 애기하고 간절히 부탁하자 관리 직원은 “당신이 정말로 ‘도레’라면 이 연필로 나를 위해 그림 하나 그려주세요.” 결국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국경을 통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무엇으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임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는 것은 세례증서도 아니요, 집사 임명장도 아니요, 장로 안수증도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과 거듭난 삶의 모습니니다.
October 29, 2023
본문: 시편 19:1-11
예수의 이름을 부르세요
서론: 우리는 벌써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우리가 가을이라는 계절을 맞이하면 세월의 흐름을 대뇌이게 되고 지나간 순간을 돌이켜 보게 됩니다. 그래서 가을은 우리에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컴퓨터를 1980년대 초에 일반인들이 처음으로 쓰기 시작하였는데, 그때 사용한 것이Microsoft의window program다. window라는 말을 붙이기 시작한 이유는personal computer의 이program을 통해 창문을 열어 세상의 상황을 접하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어의 window라는 말은 wind+eye 즉 ‘바람의 눈’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window가 바람을 막는 문(wind+dower)이라고 생각한다. 집의 창문이 있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것을 그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며 답답함을 해소하고, 그 창을 통해 밝고 따스한 빛이 들어오며, 그문을 열어 말은 공기를 집안에 들어오게도 합니다. 우리 영혼에서 눈이 있다. 우리 성도들은 두 가지의 눈이 있다. 영혼의 눈을 열어 기도로 하나님의 빛을 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바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배우며 또한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을 느끼며, 영혼의 눈으로 신앙을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학교를 학창 시절, 같은 학교에서 배운 사람을 동창이라 한다. 우리는 모두 창 갚에 서면 나무를 흔드는 작은 바람들이 우리의 맑은 시선에 다가옵니다. 이 창문을 굳게 닫은 아이들을 atheism, 즉, ‘자폐아’라고 합니다. 보는 눈이 같은 곧을 바라보지 못하며 마음이 창이 닫힌 아이를 뜻합니다. 지금 우리의 세상엔 블라인드를 내리고 어두운 방안에 살고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창문을 여세요. 마음의 문을 여세요 거기 새롭고 말고 밝은 빚과 신선하고 생기를 주는 바람이 있습니다. Helen Keller가 자기 집의 한쪽면은 모두 커다란 창문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본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때로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려 하기보단 하나님이 만드신 천하 만물을 바라보며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게 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흑백논리에 빠져 자기자신을 사방이 차단된 방안에 자기자신을 가둡니다. (1,2절) Joseph Exell이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대 자연이라는 강단을 통해 나타난다. 또한 이 이 강단은 하나님과 자연과의 관계를 나타낸다.” 라고 했다. 기독교인들의 참 자연관을 무너뜨리는 두가지 극단적 견해는 하나님을 자연안에 국한시키는 것과 하나님과 자연을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시편33:6,9에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어 졌고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성경이 자연을 하나님의 계시(일반 계시)라 합니다. 시74:16,17에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자연을 통해 자기자신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한 예로, 윤 동주의 서시에 보면 “입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닭 울기 전에 3번 예수님을 부인한 후 닭의 울음을 듣고 회개한 베드로를 우리는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Ex) 나는 운동하며 영감을 받는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자연 창조의 마지막 결정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도 또한 예수의 지체입니다. 그들(Xn)이 만든 예술을 통해 때론 신앙의 도움을 준다. 예화3) 독일의 조각가 2년이나 걸려서 조각한 후 이게 누구냐고 한 어린이에게 물었다. 시73:8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9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성전의 악장 아삽
셋째.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을 잘 지키고 보존하는 것도 참 성도의 할 일이다. 예화)16세의 환경운동가 소녀. Greta Thunberg-Trump 대통령이 무시했다. = 지구의 환경 문제가 환경 운동가가 생각 한 것만큼 심각하지 않다고 해도 나 외의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우리 후손 들에 대한 물려주는 것도 있어야 함.
넷째. 주의 말씀은 특별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기적적인 방법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기로 택하신 방법입니다.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현현, 꿈, 환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합니다. 성경은 여러 차례 물리적인 형태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기록하고 있으며 (창세기 3:8, 18:1; 출애굽기 3:1-4, 34:5-7), 하나님이 꿈 (창 28:12, 37:5, 왕상 3:5, 다니엘 2)과 환상 (창 15:1; 겔 8:3-4; 단 7; 고후12:1-7)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73: 23-26에는“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고 하였습니다.
다섯째,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결정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의 말씀은 곧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요한1: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기도와 간증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제 1위 이신 성부 하나님과 3위인 성령 만 강조되고 성자의 이름이 주축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없인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마뉴 황제의 무덤은 그의 실제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1001,1165,1215년 3번 이 무덤을 공개했다고 하는데, 그의 시신은 제복을 입은 채로 한 손은 성경의 막8.38 말씀을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는 말씀이다.
끝으로, 우리는 창문을 컴퓨터의 window 그림처럼 창문을 그리려면 사각형에 십자가를 그린다. 우리가 영적인 창문을 열려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영적 창문을 열어야 한다.
October 22, 2023
본문: 마태복음24:3-14
주의 오심을 고대하는 사람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세계의 상황들을 지켜보며 이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셨던 말세의 징조를 표현한 본문 말씀을 되새기게 됩니다.
1941년 12월 7일 이른 아침, 하와이 오아후섬에 있는 이동식 레이더 부대에서 미군 병사 두 명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레이더로 대공 감시 임무를 수행 중이었습니다. 오전 7시 20분경 레이더망에 오아후를 향해 날아오는 50여 대의 비행기가 포착되었습니다. 이들은 그 사실을 즉시 보고했지만 상관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무시했습니다. 그 후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진주만에 폭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폭격으로 2,400명의 군인이 사망했는데 그중 1,177명이 아리조나 군함의 침몰로 사망했습니다. 폭격이 있기 51분 전, 적군이 공격할 것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무시함으로 엄청난 재앙을 맞이한 것입니다. 성경은 지구의 여려 현상과 징조를 통해 예언하는 말세 지말이 가까웠다는 것과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명확하게 밝히는 이 징조를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8절에 여러 재림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그것을 “슬픔(재난)의 시작”이라 부르셨습니다. “슬픔(재난)”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오딘(odin)에서 왔는데 그것은 문자적으로 “산통”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출산을 빗대어 재림의 징조를 묘사하신 것입니다. 산모가 출산할 때가 가까워 짐에 따라 산통의 빈도와 강도가 증가하는 것처럼 세상 끝이 가까워질수록 재림의 징조도 더욱 강하고 빈번하게 발생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재림 직전의 마지막 때와 관련된 징조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정치적 징조를 말하는데, 국가 간의 그리고 민족 간의 전쟁을 말합니다. 본문 24:6-7에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이다.예수님께서는 전쟁을 마지막 때의 징조로 말씀하셨습니다. 20세기에는 수백만 명의 생명을 앗아 간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포함한 여러 전쟁이 있었습니다. 전쟁과 테러는 계속해서 이 세상을 불안정하게 하며, 엄청난 파괴와 죽음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근대의 주요 전쟁은 제1차 세계 대전: 1,600만 명 이상 사망, 제2차 세계 대전: 6,000만 명 이상 사망, 한국 전쟁: 120만 명 이상 사망 베트남 전쟁: 100만 명 이상 사망했습니다.
둘째, 물리적 징조: 지진과 기근, 질병입니다. 마태 24:7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라 하였습니다. 매해 약 50만 번 이상의 지진이 발생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거나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막대한 인명 손실의 가능성은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빈번해지는 지진(때로 쓰나미를 포함한)의 발생은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신다는 또 다른 징조입니다. 또한 전 세계 10억 명의 사람들은 매일 충분한 음식을 먹지 못하며, 5억 명의 사람들은 만성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인구의 증가와 물 부족은 가까운 미래에 아주 큰 문제로 다가올 것입니다. 전염병과 질병 또한 종말의 징조입니다. 여러 희귀 질병이 점점 더 많은 사람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증가된 지식과 기술입니다. 다니엘 12: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이 더하리라.” 다니엘은 마지막 시대의 징조로 영적인 지식의 증가와 함께 세속적인 지식과 기술의 급격한 증가를 예언합니다. 불과 수십 년 전에는 인터넷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의 모든 정보와 소식들을 담은 인터넷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셋째, 사회적 징조: 도덕적 붕괴가 있습니다. 마태 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창세기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예수님은 재림 직전 세상의 도덕적인 상태가 노아의 홍수 전 세상의 상태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회를 바라보면 부도덕과 폭력이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관계의 붕괴가 나타납니다. 본문 마태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오늘날 이혼율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가족의 붕괴는 마지막 때에 눈에 띄는 징조 중 하나입니다.
넷째, 종교적 징조: 재림 기별을 조롱합니다. 베드로후서 3:3-4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 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을 약속하셨지만(요 14:1-3)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재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무신론자들과 진화론자들같이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 가는 것은 마지막 때의 징조입니다.
거짓 기적과 거짓 선지자들 그리고 기만이 성행합니다. 본문 마태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본문이 있는 24장에서 예수님은 거짓 종교에 대하여 4차례나 경고하셨습니다. 15절에도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 하였습니다. 지금 많은 가증한 것들이 거룩한 곳에 서 있습니다. 사도 요한 또한 거짓 종교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성경은 우리에게 참된 기별과 참선지자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사 8:20). 종교적 혼란이 만연한 이 세상에서 진리의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또한 진실한 신앙의 감소가 있습니다. 딤후 3:1-2, 5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바울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이 이름뿐인 신앙인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영적인 능력은 상실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입니다. 마태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재림 전에 있을 희망의 징조는 복음(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기쁜 소식”)이 온 세상에 선포된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의 성취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재림에 대해 어떤 경고를 주셨습니까? 마태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비록 우리가 재림의 날을 정확히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이 다시 오실 날을 대비하여 끊임없이 준비하며 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마태 본장 24:32-33에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예수님께서 재림의 날짜를 추측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지만, 그와 동시에 그날의 임박성을 알기 위하여 성경의 예언과 세상의 사건들을 살피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가 무화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을 우리는 Jewish라고 합니다. ‘유다’에서 나온것인데, 유다라는 뜻은 ‘찬양하다’ 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에 관하여 많은 예언이 있었던 것처럼 그분의 재림에 대해서도 분명한 예언들이 있습니다.
말세론을 신학적 용어로 ‘Eschatalogy’라 하는데 마지막이라는 뜻의 헬라어 ‘에스카토스’에서 온 말입니다. Lober L Saucy라는 신학자는 종말론을 단순히 초월적인 힘에 개입으로 이세상 질서가 파괴되고 신의 나라의 시작으로 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에 의해 작성하신 ‘신적작정(Divine Decree)’이기에 그분의 우주 계획의 완성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October 15, 2023
본문: 미가 4:1-8,
마태복음 27:19-26
하나님의 택한 백성
우리는 지난 주간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의 하마스간의 전쟁의 상황들을 시시각각 접했습니다. 그 참혹한 상황들을 접할 때 마다 우리가 사는 최첨단 문명의 시대인 21세기의 상황이라고 믿고 싶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번의 서로 간의 살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참혹했습니다. 1920년부터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에 이스라엘재건 하려고 할 때부터 그들의 무력충돌이 있어왔습니다.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이후 이번처럼 민간인의 대규모 학살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그들이 무력 결사 항전을 시작하게 된 원인을 역사적인 것보다 우리 기독교인은 성경에서 먼저 찾아보아야 합니다.
마 27:1-2을 보면, 모든 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빌라도는 아무 죄도 찾지 못하여 방면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 27:24,25에 보면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유대인들은 이렇게 응수했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5,25) 이 말은 “만일 예수에게 죄가 없다면 그분의 피에 대하여 우리와 우리 자손이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었다. 그들의 말에 따라 빌라도는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주어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피를 흘리며 죽으신 때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운집한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분의 죽음을 지켜보는 동안 그들의 미움을 삭히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책임을 지겠다고 하나같이 외친 소리가 그들에게 어떤 운명을 가져올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외친 유대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생존하던 주후 70년으로 가보자. 유대인들은 로마의 통치를 반대하며 반항했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해 타이터스 장군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이 전쟁에 참여했다가 방면된 역사학자 조세푸스는 그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였는데, 그 중 일부를 옮겨보겠습니다.
이런 대치 중에 예루살렘을 몰래 빠져나왔다가 로마 군인들에게 잡힌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었다. 그렇게 처형된 유대인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나중에는 십자가를 만들 나무가 모자랐고, 십자가를 세울 장소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들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달리게 한 대가가 이렇게 클 줄 알았겠는가?
많은 유대인들은 금을 삼키고 예루살렘을 빠져나왔는데, 그것이 로마 군인들에게 발각되었다. 로마 군인들은 금을 찾기 위하여 유대인들의 배를 갈랐는데, 어떤 날에는 하루 밤 사이에 2,000여명이 그렇게 배가 갈리어서 죽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로마 군대가 마침내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도성과 성전을 불태웠다. 그 때가 마침 유월절이어서, 그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은 272만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몰려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갇혀서 꼼짝없이 모든 수난을 당했다. 그날 죽임을 당한 유대인은 십만명이었고, 포로로 잡혀간 사람의 수는 9만7천명이었다. 그 외에도 17세 이상 된 수많은 사람들이 애굽의 광산으로 팔려갔다.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전과 후에 죽은 유대인들의 수는 자그마치 133만7,490명이나 되었다. 이런 비극이 선민인 유대인에게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허용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다.
모세를 통하여 매년 유월절의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한 이래 (출 13:10), 유대의 역사에서 그때까지 유월절에 이방인들의 손에 멸망을 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처럼 엄청난 참사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면서 그들이 말한 보증 때문이었다.그들의 보증을 확인이라도 하시듯, 예수님은 통곡하면서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눅 19:4이하에 보면,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심판)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BC 7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 미가서는 정의, 자비,겸손을 주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시온사상을 묵상하면 몇가지 주는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이세상에서 영화와 굴욕을 함께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8:17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둘째, 우리가 아무리 위대하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도 이방인을 향한 학대와 폭력은 절대 안됩니다. 예수님은 끝가지 무저항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셔서 이세상 모두에게 성인으로 추앙받습니다. 유대인들 속에 자리잡고 있는 부정적 속성 중에 하나는 우리는 여호와의 택한 선민이기에 이방인은 다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상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영적 선민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는 주의 택한 선민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셋째, 우리는 영적 시온주의를 우리 속에 소유해야 한다. 유대인의 시온 주의 창시자 ‘빈야민 제브 테오도르 헤르츨’은 무신론 자였습니다. 그는 이 땅에 시온성을 꿈꾸었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이 예비하시는 저 하늘의 시온성을 꿈꾸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1-4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October 8, 2023
본문: 요한 일서 4:15-21, 사도행전 28:1-6
사랑의 영향력(The Influence of Love)
중세 유럽에서 전해 내려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한과 베티라는 젊은 부부가 깊은 산골에서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큰 농장에 대한 꿈을 키우며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인 요한은 일주일에 한 번씩 도시에 나가 장을 보아 왔는데, 너무 멀어서 하룻밤을 그곳에서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런 경우 베티는 한 살이 못된 아들과 네 살 난 딸을 데리고 이틀 간을 혼자 보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요한이 장을 보러 떠나면서 이번에는 일이 밀려 이틀 밤을 지나고 온다고 하며 떠났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요한이 떠나고 빵을 굽기 위해 뒷들에 가서 장작을 가져오려 장작 더미를 들추는 순간 그 속에 있던 독사에게 다리를 물리고 말았습니다. 장작으로 내리쳐 뱀을 죽였지만, 이미 독이 다리를 타고 퍼지기 시작했고 그가 얼 마지 않아 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남편은 이틀 후에나 오니 자기가 죽으면 두 아이들의 생사가 더 걱정되었습니다. 우선 아이들을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여름 날씨에 죽을 힘을 다해 장작을 피우고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이 먹을 것들을 준비하다 보니 퍼져가는 독 때문인지 혼미 해져갑니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죽을 힘을 다하여 아이들을 위해 먹을 것들을 뜨거운 불 앞에서 준비하다 보니 온몸에서는 땀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줄줄 흘린 땀때문에 혈관에서 독이 씻겨져 나와 자신의 생명을 건질 수 있을 줄은 자신도 몰랐습니다. 몇시간이 흘러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깜작 놀랐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세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그녀는 사명감 때문에 살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녀가 두려움에 낙심하여 주저앉아 죽음을 기다렸다 거나 살아야겠다고 약을 찾아 다녔다면 그녀는 물론 자녀들도 위험에 빠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 그녀의 뜨거운 사랑이 그녀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린 자녀만이라도 살리려 했던 그 뜨거운 모성적 사랑이 자신은 물론 자녀까지 살릴 수 있었습니다.
셋째,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우리를 살리게 됩니다. 중세의 유럽 사람들은 다 기독교 문화와 관습속에 살았기에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며 그녀는 마지막 삶의 순간들을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사도행전 28장의 사도 바울은 ‘유라굴로’라는 지중해의 풍랑을 만나 배가 좌초, 난파 됬었습니다. 천신 만고 끝에 간신히 멜리데라는 섬에 다다라서 구조되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모닥불을 피우던 중 장작더미에 있던 독사가 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던 사건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우리에겐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알려 진 손양원 목사님의 일대기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1948년 발생한 여순사건 때 큰 사건이 일어났 바로 두 아들의 죽음이었다. 손양원의 두 아들인 손동인 씨와 손동신 씨는 우익 학생 단체 중 하나인 전국학생연맹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 좋게 보던 반란군 세력이 반란 당시 기독교도라는 사실을 빌미 삼아서 두 사람을 순천의 동천 인근에서 살해한 것이다. 당연히 그들의 가족들과 애양원 사람들은 크게 슬퍼하고 있었는데 손양원 목사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행동을 하였다. 두 아들의 장례 예배 때 손 목사는 감사 기도를 올린 것이다. 감사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 무슨 답사를 하고 무슨 인사를 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서 몇 말씀드립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 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열 번째, 이렇듯 과분한 축복 누리게 되는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바로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신의 아들로 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반란이 진압된 이후 손 목사는 실제로 반란군 인사 중 안 재선이란 좌익학생이 손 형제를 살해했다고 자백하자, 이를 용서하고 안 재선 씨를 자신의 양자로 삼은 것입니다. 정말 손 목사님의 이 위대한 사랑의 영향력을 저희들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 “우리가 사명으로 살라가는 한 우리의 목슴은 불멸인 것을”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October 1, 2023
본문: 요한복음 4:34-42
전체적 그리스도인(Major level Christian)
미국에서 잘 사용하는 농담 중에 ‘Sprinkling Christian’이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평생에 세 번은 교회와 연결되는데, 어린시절 유아세례를 받을 때 물 뿌림을 받고, 성년이 되어 결혼식이 끝날 때 교회당에서 꽃가루와 쌀이 뿌려지는 것을 받고, 인생이 끝나 묘지 하관식 때 목사의 기도가 끝나면서 참석자 들이 흙을 한 줌씩 뿌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미국에는 ‘Christer Christian’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일년에 두 번 크리스마스와 부활절(Easter)에 나오는 사람을 향하여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보다 더 심하여 유럽에는 ‘네 바퀴 교인’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평생에 세번 네 바퀴 달린 것이 실려 나오는 사람을 말한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유모차에 실려서 유아세례 받으러 나오고, 결혼식 때 장식한 네 바퀴 자가용 타고 교회에 오고, 죽어서 장례식때 네 바퀴 영구차에 실려 일생에 세번 겨우 교회에 오는 교인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미국이나 구라파의 교회가 쇠퇴하여 활기와 생명을 상실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교인 명부에 실려 있는 사람들을 교인으로 보지만, 한인 교회에서는 대개 정규적인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을 성도로 간주합니다.
많은 분들이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 이내용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나 사역자들을 향한 말씀이라 생각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본문말씀을 우리의 영적 상태 적용해서 상고하려 합니다.
먼저, 우리의 내적 열매들을 점검하며 자신들을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35절에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는 말씀은 먼저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을 밖에 나가서 많이 외치라는 것으로 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의 영혼의 추수를 먼저 생각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둘째, 지금 나의 영혼은 어느 정도 주의 뜻을 나의 삶 속에 이루어 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34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마리아 여인이 찾는 새상의 우물물을 마시려고 하지 않습니까? 미국의 Russel Hale 교수는 깊고 높은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가지 못한 겨인들을 7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첫째 부동의 교인으로 성전의 뜰만 밟는 것으로 만족하는 ‘히에런(성전뜰)적 교인’입니다. 한 번도 제대로 헌신을 하지 못하고 외곽에서만 겉도는 교인입니다. 둘째는 교회의 기관을 반대하는 사람으로 교회의 조직이나 기구에 불만을 느끼며, 오붓한 소그룹과 친교를 중요시합니다. 셋째는 쾌락주의자들로 자기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넷째는 자폐증적 교인으로 먼저 믿는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한다 거나 부한 자나 교만한 자들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믿고 스스로 고립된 자며, 다섯째는 방랑자적 기질이 있어 이 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리는 사람. 여섯째는 교회는 바리새인 같은 위선자로 가득 차 있다고 목청을 높이는 사람. 일곱째는 성경의 기사 내용을 전혀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 7가지의 부류를 ‘Semi-Christian’이라고 부른다.
셋째, 전체적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희 조상들이 섬기던 하나님을 택하든지 가나안 우상신을 택하든지 오늘 선택하라고 말하면서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라고 선언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의 참신대결 현장에 노인 백성들을 향해 “너희가 어느때까지 둘사이에서 머뭇거리려 하느냐?”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헌신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신앙이란 자기 부정을 통한 하나님께 로의 귀환이며 결단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통한 적극적인 헌신과 열정적 봉사로 그 극치와 완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Semi나 Minor Christian이 되지 말고, Major Christian이 되어야 한다. 지금의 사회가 고도화된 기술이 이루어지고 또 교회가 차원 높은 교인으로 이루어져도 주님이 바라는 성도상은 니고데모나 가말리엘 같은 Semi- Christian아아니라 전 인격과 혼신을 불태워 가는 구약의 요셉과 다니엘, 신약의 바울과 같은 Major Chrstian입니다. *사마리아여인의 전도
본문 42절에서 사마리아 인들이 나중엔 여인의 말이 아니라 친히 예수께 듣고 구주로 믿었다.
장영희 교수님의 유고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 보면 '나의 불가사리'라는 제목의 수필이 있습니다. 간밤에 폭풍우로 밀려온 불가사리들이 새까맣게 백사장을 뒤덮고 있었을 때 열 살 정도 된 소년 하나가 불가사리를 하나씩 바다로 던지고 있었습니다. 해가 뜨면 불가사리들이 태양열에 그을려 죽게 될까 염려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지요. 이 광경을 지켜본 남자 어른이 비웃었습니다. "얘야, 이 해변을 봐라. 폭풍우로 밀려온 불가사리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많은데 네가 하는 일이 무슨 도움이 되겠니?" 소년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불가사리를 힘껏 바다에 계속해서 던지며 말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방금 바닷속으로 던진 저 불가사리에게 만큼은 도움이 되겠지요."
September 24, 2023
본문: 요엘 2:12-14,
요한일서1:5-9
영적 대 각성
오늘 오후 부터는 유대인들의 큰 절기 중의 하나인 ‘대 속죄일(Yom Kiper)’입니다.유대의 일곱번째 달인 티슈리월 10일에 매년 한 번씩 돌아오는 절기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명절들 가운데 가장 엄숙하고 성스러운 명절로 여겨집니다. 이 날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정교한 의식 절차를 행합니다. 우리가 레위기23:-27,28 말씀에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28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유대인의 명절을 다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만 우리 그리스도인 들은 세상 속에 살다보면 우리는 자주 죄악에 노출되며 그런 죄악을 조금씩 범하게 되면 그런 죄들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경국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이 여호와께 ‘대 속죄일’ 지키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영적 대 각성의 시간들입니다. 또 유대인들이 이 절기에 대속죄의 제사를 드렸지만 우리 성도는 성경말씀 히브리서9:11에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고 하셨으니, 구주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그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요일 1:9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라고 약속하셨으니, 주 앞에 나와 자백함으로 영적 대각성의 시간을 가지면 됩니다. 회개는 죄에 대한 자백과 주께로 주께서 사유의 확신이 필료함. 지금 현대의 우리는 세상의 유혹의 문화속에 젖어 하나님과 영적관계가 소월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몇 성도들은 지금도 시간들을 떼어 영적 갈급 함을 가지고 주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현대의 인터넷 문화에 젖어 영적 삶을 소월히 합니다. 오늘 유대인들의 대속죄일 기간에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영적대각성의 시간을 가져야 할지 생각해 보려 합니다.
먼저, 우리는 듣는 신앙이 아닌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갖어야 합니다. 오늘 인터넷이나 유 튜브를 통해 말씀이나 설교 그리고 영화나 간증을 보고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신앙의 성장이 더디며, 성숙함이 부족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딤후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라고 하십니다.
둘째, 찬양과 기도로 주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에베소서 5:19-20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장막성전에 나가서 드렸지만, 우리는 교회와 우리의 삶속에서 그런 찬양과 기도가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셋째, 드림과 섬김이 있는 예배와 삶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무리”를 뜻합니다. 예배는 혼자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와 함께 드리며, 또한 성도 간의 교제속에 섬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온전한 뉘우침과 돌이킴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悔改)’란 돌이킬 ‘회’자와 고칠 ‘개’자를 사용합니다. ‘각성’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뉘우친 사람은 다시 그 길로 돌아서지 아니하는 것이 온전한 회개입니다. 잠언 26: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예)Éleuthère I du Pont의 딸 에델
September 17, 2023
본문: 베드로후서 1:3-11
영적 대 각성
우리가 사는 세계는 지난주 동안 근래의 경험하지 못한 2가지의 대 재앙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일 에는 모로코에서 강도 7도의 강진이 발생해 3000명의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같은 날 지중해의 태풍 ‘Daniel’의 영향으로 리비아에서 홍수가 발생하여 댐이 일시에 무너져 급류가 덮친 항구도시 베르나에서 1만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구의 온난화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 세계는 기후변화로 인해 커다란 재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6절부터 8절에 예수님께서 말세의 징조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는 말씀입니다. 지금의 현상들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실에 지나치게 시켜서 시기까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세계는 전쟁의 소문도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사실 또한 우리들과 전혀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난 주 러시아의 푸틴과 북한의 김 정은이 만나 전쟁무기의 협력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우리는 이 두국가가 70여년전 한반도에 최악의 비극 6-25전쟁의 원흉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이들의 만남을 심각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 믿는 성도는 어떠한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오늘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권면한말씀을 통해서 함께 상고하려 합니다.
오늘 서두에서 주의 오심을 예비하며 사는 우리의 가장 큰 목표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원문에서 이 말은 “신적 교제를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본문 3절은 존 웨슬리가 회개할 때 놀라운 영적 경험을 한 구절입니다. 1738년 5-25일 그의 일기책에는 “오늘 아침 5시경 나는 성경을 피고 이 말씀을 발견했다. 우리에게 놀랍고 크고 귀한 약속을 주셨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게 되게 하려 하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과연 어떤 삶을 힘써 살아야 할까요? 본문에서 이것을 8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먼저, 믿음에 덕을 세우는 일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벵겔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어디에다 더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이 순서가 나와 있습니다. 먼저 믿음을 갖고 그 다음에 덕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 신앙에 있어 행실과 봉사 먼저가 아니라 ,주 앞에서 영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 먼저입니다.
둘째, 지식과 절제를 갖는 신앙인 것이다. 이 지식은 인간적인 ‘그노시스’를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 신앙에서 이해, 식별, 통찰력 등을 가하지 못할 때 악인의 이용물이 될 수 있으며,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절제는 자기 통제입니다. 오늘 많은 열정적 신앙인들이 독선적 사역자나 이단 교주에게 빠지는 이유 중에 하나는 지식과 절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인내와 경건을 소유해야 한다. 경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인내이다. 경건의 훈련은 지속적이며 단계적이기에 반드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넷째, 형제 우애와 사랑입니다. 아가페적 사랑이 없는 인간적 형제 사랑 ‘필로스’은 쉽게 무너집니다.
끝으로, 우리는 Exodus의 신앙에서 Eisodus 의 신앙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430년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던 것을 Exodus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 가는 것을 Eisodus 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지금 인생의 광야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영적 가나안 성인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더 이상 광야생활에서 만족을 찾는 출애굽만 생각하는 백성이 백성이 되어서는 않됩니다. 오늘 사도배드로가 마지막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가나안 성에 들어갈 주의 백성들에게 8가지 단계를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믿음과 덕, 지식과 절제, 인내과 경건, 형제 우애와 사랑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 천국 백성이 되십시다.